불법 복제된 신용카드 들고 와서
명품 호화 쇼핑 후 본국에 빼돌려
국내선 복제 쉬운 마그네틱 혼용
외국인 위조카드 적발 2배 급증
루마니아 등 마약 밀수지역 부상
경찰 “특정 조직 勢 확산” 수사 착수
지난해 11월 인천공항을 통해 차례로 입국한 루마니아인 5명은 서울 강남의 유명 백화점 명품관을 찾아 초호화 쇼핑을 즐겼다. 많게는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명품가방과 핸드백을 거침없이 구입한 이들은 영락없는 유럽의 부유층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에서 고가 명품을 사오면 물건값의 10%를 떼주겠다”는 범죄조직 총책의 지시에 따라 위조된 신용카드를 들고 입국한 동유럽 사기단의 일원이었다.
최근 가짜 신용카드를 이용한 동유럽 출신의 금융사기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수사당국은 현지의 특정 범죄조직이 국내에 터를 잡고 일련의 사기범죄를 기획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배후를 추적 중이다.
3일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1월 루마니아인 A(27)씨가 부산에서 같은 수법으로 4,000만원 상당의 귀금속을 구매했다가 붙잡히는 등 작년 한 해 동유럽 출신이 저지른 사기 범죄는 10여건, 검거자는 20여명에 달한다. 이들 대다수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불법 입수한 카드정보로 위조카드를 만든 뒤 한국에 들어와 유명 백화점을 돌며 명품을 구매해 본국으로 보내거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돈을 직접 인출하는 수법을 썼다. 지금까지 주로 동남아 등 아시아권 사기조직에서 반복됐던 범죄 패턴이 동유럽 국가로 번진 것이다.
국내에서 동유럽 범죄자들의 사기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경제난과 깊숙이 연관돼 있다. 황석진 경찰수사연수원 교수는 “2011년 유럽 발 금융위기 이후 충격파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등 가난한 동유럽에 집중되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카드위조 범죄에 가담하는 빈민층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철민 한국외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과 교수도 “동유럽 일부 국가가 유럽에서 2류민족 취급을 받는 것과 달리 아시아권에선 심리적 저항이 적어 명품 쇼핑을 가장한 범죄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한국 고유의 환경도 이들이 한국을 범죄 대상으로 선호하는 이유로 제시된다. 한국인이 다른 유색인종에 비해 백인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복제가 쉬운 마크네틱 카드가 한국에선 자유롭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미 복제가 어려운 집적회로(IC)카드와 IC전용 단말기를 도입한 유럽 주요국가와 달리 국내에선 두 가지를 혼용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같은 금융사기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내 부담으로 넘어온다. 통상 외국인이 국내에서 카드를 사용하면 국내 카드사가 전표 대행을 먼저 하고 나중에 해외 카드사에 대금을 요청하는 구조다. 그러나 위조된 마그네틱 카드는 추후 적발돼도 해외 카드사에서 대금 지불을 거부하기 일쑤여서 국내 카드사만 손해를 입고 있다.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외국인들의 위조카드 적발 건수가 2014년 대비 2배 정도 늘었다”고 전했다.
수사당국은 금융사기를 전문으로 하는 동유럽 범죄조직이 국내에 자리를 잡고 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국내와 동유럽 현지를 아우른 대규모 범죄 네트워크가 구축될 경우 새로운 유형의 강력범죄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의 입출입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유엔 등 국제기구들은 각종 보고서를 통해 동유럽 국가들을 새로운 마약 밀수입 루트로 지목했다”며 “아직은 위조카드 범행이 전부이지만 향후 마약 유입 등을 막기 위해 범죄 연결고리를 조기에 차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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