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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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손님

입력
2015.12.3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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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등장인물

약사 (남, 30대)

소녀 (여, 10대)

여자 (여, 50대)

무대

약국은 상가 1층에 있다. 문은 오른쪽이다. 가운데는 약들로 가득한 서랍장이 있다. 진열대 위로 컴퓨터와 화분들이 있다. 조제실은 왼쪽이다. 텔레비전이 조제실 옆에 있다. 환자들이 대기하는 곳에는 긴 의자가 있다. 오른쪽 문 옆에는 정수기와 우산꽂이가 있다.

약국전화벨이 울린다. 약사는 진열대 앞에서 전화를 받는다.

약사 여보세요. 약국입니다. 아, 네. 부의금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얼마 전에도 다녀가셨었는데,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요. 네. 고생은요. 비가 와도 해야죠. 아닙니다. 네. 담에 들리세요. 감사합니다.

약사가 전화를 끊으면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딸랑 소리가 나면서 약국 문이 열린다. 소녀가 들어온다. 소녀의 옷은 젖었고 우산을 들었다.

약사 옷이 다 젖었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약사는 조제실로 들어간다.

소녀는 약국을 두리번거린다.

약사는 수건을 소녀에게 건넨다. 소녀는 수건으로 대충 닦는다.

약사 비가 갑자기 더 많이 오네. 감기 걸리지 않게 잘 닦아요.

소녀 괜찮아요.

소녀는 두리번거리며 약국을 살핀다.

소녀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전부 다 그대로예요.

약사 약국은 항상 똑같죠. 오랜 만이네요.

소녀 기억하세요?

약사 그날 식겁해서 아직도 생생한걸요. 무작정 들어와서 숨겨달라고 하고는, 경찰에 신고도 못하게 하고, 전화번호도 모르니 어떻게 된 건지 궁금했어요. 아무 탈 없는 거죠?

소녀 네.

약사 그날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그때 쫓아온 남자 분은 누구에요?

소녀 모르는 사람이에요.

약사 모른다고요? 그런데, 왜 숨은 거죠?

소녀 절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려고 했어요.

약사 경찰엔 왜 신고를 안 했어요?

소녀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요.

약사 납치당할 뻔했는데,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니.

소녀 제가 예전에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신고한 적이 있었어요. 제가 장난전화라도 한 줄 알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어요. 급한 볼 일이 있었는데도, 꼼짝 못하게 했어요. 그 뒤론 신고 같은 건 안 하기로 했어요.

약사 모르는 사람이 쫓아오는 일 같은 걸 신고 안 하면 큰일 당해요.

소녀 (한숨 쉬며) 큰일은….

약사 무슨 일 있어요?

소녀는 의자에 앉으며 약국을 둘러본다.

소녀 약국에 있는 게 지겹지 않으세요?

약사 힘들 때도 있지만, 지겨운 적은 없어요.

소녀 언제 힘드세요?

약사 몸이 피곤할 때도 힘들지만, 단골 환자분들 중에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꽤 계세요. 그 분들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가장 힘들죠. 어쩌면 친척보다 자주 만나고 속사정도 더 잘 알거든요. 며칠 전에도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그 분이 드시던 약을 보면, 그 환자분과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가요.

소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약국을 두리번거린다.

소녀 저….

약사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소녀는 머뭇거리며 말을 못한다.

약사 테스트기?

소녀 아니요.

약사 피임약?

소녀는 고개를 젓는다.

소녀 수면제요.

약사 잠을 못 자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약사 생활이 불규칙하면 잠이 안 올 수 있어요. 잠이 안 올 때는 약보다도 유산소 운동도 하고, 잠들기 두 시간 전부터 잠잘 분위기를 만들면서 자려고 노력하면 많이 좋아져요.

소녀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올려놓는다.

소녀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어요. 다들 주지 않아요.

약사 잠이 안 올 때 먹을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 먹으면 습관이 돼요.

소녀 여기 오면 주실 줄 알았어요.

약사는 소녀에게 돈을 돌려준다.

약사 수면제는 근본적 치료가 되지 않아요. 잠을 방해하는 요인을 찾아 없애는 것이 좋아요.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일이 있어요? 뭔가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요.

소녀 고민…. 모두들 제 말은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제가 말하고 싶을 때 다들 외면했어요. 웃긴 건 제가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다들 말하라고 하는 거에요, 항상 그래요. 제게 관심이 없다가, 일이 생기면 그때 제게 물었어요. 사실 관심도 없으면서, (사이) 일이 커지는 게 귀찮으니까 관심을 갖는 척 하는 거에요.

약사 무슨 일이죠?

소녀는 머뭇거린다.

소녀 친구가 죽었어요.

약사 저런. 어쩌다가?

소녀 뛰어내렸어요. 아파트 옥상에서요. 멀쩡하게 있던 애가 죽었데요. (혼잣말 하듯) 어떤 느낌이었을까?

약사 학교 친구?

소녀 같은 반 친구에요. 참, 우습죠? 죽는다는 게 뭘까요? 학교는 똑같았어요. 아침 조회 때 지각하는 애들, 수업 때 조는 애들, 딴 짓 하느라 혼나는 애들과 함께 분주하게 지냈어요.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는데,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부를 때, 기분이 이상했어요. 선생님이 분명 제 이름을 부르는데 딴 사람 이름처럼 느껴졌거든요.

약사 선생님이 왜 부르셨어요?

소녀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저였어요.

약사 어디서 봤었는데요?

소녀 학교가 끝나고요. 그 친구는 학원에 갈 시간이었는데, 집에 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전 집에 간 줄만 알았거든요. 그날따라 학교 화장실도 자주 들락날락했어요. 수업 시간에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고, 딴 짓을 해서 선생님께 자꾸 지적을 받았어요.

약사 무슨 일 때문인지 알아요?

소녀 그건… 저 때문이에요.

약사 왜요?

소녀는 주저한다.

소녀 그 친구는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죽었어요.

소녀는 흐느낀다.

약사 사람은 누구 때문에 죽는 경우는 없어요.

약사는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소녀에게 건넨다.

약사 이거 마셔요.

소녀는 고개를 젓는다. 약사는 음료수 뚜껑을 열어준다. 소녀는 한 모금 마신다.

약사 친구랑 친했어요?

소녀 친하는 게 뭐죠?

약사 친구에 대해 잘 알고, 속마음을 얘기 할 수 있는 사이 아닐까?

소녀 그 친구는 제게 무언가 늘 말하고 싶어 했는데, 전 그냥 지나쳤어요. 수행평가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학교 끝나고 학원 갈 시간이 빠듯해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어서, 항상 다음에 얘기 하자고 했어요.

약사 그럴 수 있지.

소녀 제가 조금만 시간을 내서 그 친구 얘기를 들었더라면, 그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았을 텐데요. 그러면, 그 친구가 죽지 않았을까요?

약사 친구가 죽은 후로 잠이 안 온 거죠?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 처음엔 저도 잘 몰랐어요. 학교생활은 똑같았고, 친구의 빈 책상은 치워졌어요. 제 사물함 안쪽 끝에서 친구 물건이 나왔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꿈에서 친구를 만났어요.

약사 친구 꿈을 자주 꿔요?

소녀 가끔요. 그런데,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저만 보고 웃고 있어요. 저도 그 친구를 보고 웃으려 하는데, 웃음이 나오질 않아요. 제가 웃지 않으니까, 친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요. 그러다가 절 돌아서서 가요. 저는 친구 이름을 부르지만, 소리가 하나도 나오지 않아요. 제가 친구 이름을 간신히 부르면 잠에서 깨버려요.

약사 그 날 이후로 잠을 제대로 못 자는군요.

소녀 어느 날, 친구 엄마가 저희들을 만나러 오신 적이 있어요.

약사 학교로 오셨어요?

소녀 학교 앞 작은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만났어요.

약사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소녀 친구의 일기장을 읽으셨대요. 일기장에 제 얘기가 많이 나와서 절 만나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약사 일기장에 뭐라고 적혀있었는데요?

소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근데, 친구엄마의 표정은 생생해요. 절 많이 원망하셨고, 저한테 왜 그랬냐고 물으셨어요.

약사 뭐라고 대답했어요?

소녀 한 마디도 못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나왔어요.

약사 그 뒤로 친구 엄마를 또 만난 적이 있어요?

소녀 가끔 마주치면 제가 일부러 다른 길로 피해갔어요.

약사 피하는 것이 마음 편해서?

소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절 보면 속상하실 것 같았어요.

소녀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소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약사 받아요.

소녀 장난전화에요.

소녀는 휴대전화의 배터리를 분리한다.

소녀 이제 가 봐야겠어요.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 울린다.

약사 비가 많이 오는데, 좀 줄어들면 가요.

소녀 다른 곳에 가 봐야 해요.

약사 부모님께 데려다 달라고 전화해요.

소녀 다들 바쁘세요.

소녀는 약국을 뛰어나간다. 약사는 소녀를 부른다.

약국 전화벨이 울린다. 약사는 소녀를 부르다가 전화를 받으러 간다.

약사 약국입니다. 네. 열이 몇 도인지 재 보셨어요? 체온계가 없어요? 아, 네. 해열제는 있고요? 아기가 몇 살이죠? 네. 일곱 살이요. (해열제 박스를 들어서 보며) 몸무게는 얼마죠? 네? 7㎏이요? 어떻게 일곱 살인데, 7㎏밖에 안 나가요? (한숨을 쉰다.) 아… 강아지요. (힘이 빠져) 2.5cc 먹이시면 될 것 같아요. 내일 병원 문 열면 데리고 가보세요. 동물병원에 가야 더 정확하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딸랑 소리와 함께 약국 문이 열린다. 약사는 전화를 끊는다.

여자가 다급하게 들어온다. 여자의 옷이 젖어 있다.

여자 죄송합니다. 혹시 여자아이 못 보셨나요?

약사 여자아이요?

여자 딸을 찾고 있어요.

약사 방금 한 여학생이 왔다 갔는데요.

여자 왔다 갔다구요?

여자는 사진을 꺼내 약사에게 보여준다.

여자 이 아인가요?

약사 맞아요.

여자는 의자에 털썩 앉는다.

약사 무슨 일이십니까?

여자 이 주변을 다 찾아 다녔어요. 이곳을 마지막으로 들른 건데.

약사 다시 찾아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여자는 힘없이 고개를 젓는다.

여자 다 헛일이에요.

약사 경찰에 신고할까요?

여자 아녜요.

약사 이렇게 혼자 다니셔도 찾기 힘드실 거에요. 도움을 받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자 경찰에 신고해도, 늘 이랬어요.

약사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 아무리 집에 데리고 와도 다시 나가더군요.

여자는 생각난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여자 수면제 사러 왔었나요?

약사 왜 그러시죠?

여자 (힘없이) 약을 사서 모으고 있었어요. 우리 딸이요.

약사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자 일기장을 봤어요. 죽기 위해서 약을 모으고 있다고 썼더라구요.

약사 누구나 한 번쯤은 일기장에 죽고 싶다는 말을 쓰기도 하잖아요.

여자 맞아요. 저도 그 일기장에 쓰인 글이, 한 때 감정으로 쓰여 진 글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이) 제가 딸에게 관심을 더 기울였어야 했는데.

약사 자책하지 마세요.

여자 어느 날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담임선생님이 절 만나고 싶어하셨어요. 저는 일을 하고 있어서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했는데, 담임선생님은 제가 퇴근 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절 만나시겠다고 하시는 거에요. (사이) 기분이 이상하더라구요. 무슨 일 때문인지 걱정도 되고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학교에서 전화 온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여자는 의자에 앉는다. 약사는 여자에게 물을 가져다 준다.

약사 물 한 잔 드세요.

여자 고맙습니다.

여자는 물을 마신다.

여자 담임선생님은 제게 딸의 학교생활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더군요. (사이) 근데, 전 딸이 몇 반인지, 친한 친구 이름도 모르고 있었어요.

약사 바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여자 전, 딸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딸에게 무관심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는 일처럼 결혼도 출산도 제겐 하나의 숙제였어요. 남들이 다하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과제처럼 여겼던 거에요.

여자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여자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같이 생활한다고 엄마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정말 바보 같아요.

약사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무리 잘해도 어려운 일 아닐까요?

여자 전 모르겠어요. 제 탓이라는 생각만 들어요.

약사 조금만 더 너그럽게 자신을 생각해보세요.

여자 아,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전 제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어요. 저로 인해서 딸이 잘못됐고, 그것 때문에 또 다른 아이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도요.

약사 따님이 무슨 잘못을 한 건가요?

여자 딸이 다른 아이를 괴롭혔대요. 그 말도 사실 믿기 힘든데, 그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가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약사 따님이 친구를 괴롭혔다고 그래요?

여자 담임선생님 말씀을 들을 때, 제가 다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더 믿기 힘들었어요. 저는 선생님께 물어보고 또 물어봤어요. 제 자신이 납득될 때까지요. (사이) 문득, 이런 얘기를 딸에게 직접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손을 몸으로 감싼 채 왔다갔다 한다.

여자 집에 오자마자, 전 미친 사람처럼 딸에게 퍼부었어요. 앞뒤 가리지도 못했어요. 제 속이 시원할 때까지 소리를 질렀어요. 제가 펄펄 뛸수록 딸은 점점 더 차분해졌어요.

약사 따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처음엔 말이 없는 딸에게 화가 났는데,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생겼어요. 진짜 내가 아는 딸이 맞을까? 전혀 모르는 남처럼 느껴졌어요.

약사 변명도 하지 않던가요?

여자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을 했어요. 어떻게 하면 딸에게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하고요.

약사 들으셨나요?

여자 달래고 어르고 해서 간신히 한마디 들을 수 있었어요.

약사 뭐라던가요?

여자 죽은 그 아이는 딸에게 여러 번 대화를 하자고 했었나 봐요. 딸은 그 말을 무시했대요. 그때 대화를 잘 했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까요?

약사 무슨 사정이 있겠지요.

여자 처음엔 사소한 트러블이었어요. 학교 방송실 마이크 사용으로 말다툼이 있었는데, 딸이 좋아하는 남자애가 그 아이 편을 들었다는 거에요.

약사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더 크죠.

여자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생각했는데 왜 일이 이렇게 까지 됐을까요? (사이) 제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큰 사건이 생기니까 이제야 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아무 탈 없이 있다는 건만 편하게 생각했던 거에요.

약사 평소에 따님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나요?

여자 어렸을 땐, 제게 안기고 저와 같이 있고 싶어 했어요. 점점 자라면서 제가 딸하고 대화를 해 본적이 없었어요. 갑자기 대화를 하려고 하니, 무슨 말부터 할지 모르겠어요.

약사 누구라도 차분해지기 어려울 겁니다.

여자 제가 딸을 장식품처럼 여겼다는 걸 몰랐어요. 딸의 마음을 읽지 못했어요. 아마 읽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화만 났었어요. 예전에 그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변했다고 생각한 거죠.

약사 따님 입장을 지금은 이해하시잖아요.

여자 그런 제 생각을 전달할 수가 없었어요. 처음엔 제가 화만 냈고, 이젠 딸이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요.

약사 늦은 때는 없습니다.

여자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잘 될 수 있을까요?

약사 걱정 마세요.

여자 전 딸 일기장을 읽고 나서 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전 딸을 낳고 즐거웠던 적이 있었을까?

약사 일기장에 뭐라고 쓰여 있던가요?

여자 “난 왜 태어났을까? 엄마는 날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태어난 건 실수일까?” 이걸 읽을 때, 너무 뜨끔했어요. (사이) 한 번도 딸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약사 일이 지치고 힘들면 그럴 수 있어요.

여자 어떤 것도 변명이 되지 않아요.

번개치고 천둥소리 들린다.

여자 가 봐야겠어요.

약사 어디 가시게요?

여자 모르겠어요.

약사 어쩌면 집에서 기다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자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여자 한 번도 울린 적이 없어요.

약사 집에서 기다리면서도 전화 못하고 있을 수 있어요. 집으로 가 보세요.

여자는 우산을 들고 약국 문을 연다.

여자 혹시, 다시 온다면 제가 왔다는 얘기 하지 마시고, 집에 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약사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여자는 약국을 나간다. 약사는 전화를 건다.

약사 (휴대전화기에 대고) 비가 많이 오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갈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알았어.

딸랑 소리가 나면서 약국 문이 열린다.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다.

약사 좀 있다 전화할게.

약사는 전화를 끊고 소녀에게 간다.

약사 다시 왔네요. 괜찮아요?

소녀 (숨을 고르며) 저 좀 도와주세요.

약사 무슨 일 있어요?

소녀 이상한 사람이 절 쫓아와요.

약사 지난번 그 사람인가요?

소녀 모르겠어요.

약사 여긴 널 보호해줄 만한 곳이 못 돼. 집으로 가는 건 어때요?

소녀 아무도 없어요.

약사 집에 아무도 없다니? 부모님이 널 기다리며 걱정하고 계실 거야.

소녀 누구도 저한테 신경 안 써요.

약사 그렇지 않아. 부모님이 널 애타게 기다리고 계셔.

소녀는 약사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약사는 약간 움찔한다.

소녀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죠?

약사는 조제실로 돌아가려 한다. 소녀는 약사를 붙잡는다.

소녀 대답하세요.

약사 그건….

소녀 왜 대답을 못하세요?

약사 네 엄마가 널 찾고 계셔.

소녀는 약사를 잡은 손을 놓는다.

소녀 우리 엄마? 우리 엄마를 알아요?

약사 그건….

소녀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약사 학생이 나간 뒤 바로 이곳에 오셨어요.

소녀 그래서요?

약사 널 애타게 찾고 계셔.

소녀 누가 그래? 날 찾는다고?

약사 진정해. 이곳에 온 걸 비밀로 해 달라고 하시더라. 널 걱정하고 계시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소녀 무슨 얘기를 들었어요?

약사 아무 말도 안 들었다.

소녀 내가 미쳤다고 그러지 않아요?

약사 그런 말씀 안 하셨어. 네가 딸인데 그런 말을 할 부모가 어디 있니?

소녀 나 때문에 누가 죽었다는 말 안 해요?

약사 그런 말씀도 안 하셨다.

소녀는 약사를 두 손으로 붙잡는다.

소녀 엄마가 뭐라고 하셨어요?

약사 (애써 침착하게) 이제 곧 약국 문을 닫을 시간이야.

소녀 문을 닫는다구? 내 질문에 답도 안 하구?

약사 시간이 늦었다. 어머니도 널 기다리시고 집에 가라.

약사는 손으로 소녀를 밀어내려 한다. 소녀는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소녀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에요?

약사 (놀라서) 내가 뭘?

소녀 분명 절 도와주실 것처럼 그랬잖아요. 모두들 제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절 외롭게 했지만, 아저씨는 제 마음을 이해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 속마음을 다 털어 놓았구요. 전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말을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 어요? 전 너무 무섭고 힘들었어요. 아저씨라면 도와줄 줄 알았는데. 똑같아요. 관심 없으면서 관심 있는 척한 것 뿐이라구요.

약사 (달래면서)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널 돕고 싶어. 하지만 부모님은 널 잘 도와 줄 수 있어서 그런 거야.

소녀 (말을 자르며) 다 거짓말! 모두 다 거짓말이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친절한 척 위선을 떤 거였어. 저한테 왜 그러신 거죠? 심심해서 저랑 말 섞은 거였어요?

약사 말이 심하구나. 네가 아직 어린데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런 거야.

소녀는 자신의 윗옷을 찢는다.

약사 너 왜 그래?

소녀 무슨 상관이에요?

약사 여기서 나가줬으면 좋겠다.

소녀는 의자에 앉는다.

소녀 싫어요.

약사는 소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한다. 소녀는 의자에서 버틴다.

약사 나가. 말을 안 들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

소녀 신고하세요.

소녀는 자신의 옷을 더 뜯는다.

약사 너 왜 그러니?

소녀 아저씨야말로 저한테 왜 이러세요?

약사 이런 식으로 친구를 괴롭혔니?

소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약사 앞으로 선다.

소녀 뭐라고 하셨어요?

약사 미안하다.

소녀 다시 한 번 말하세요.

약사 잘못 말한 거야.

소녀 날 살인자로 생각하세요?

약사 그런 말 한 적 없어.

소녀 모두들 날 그렇게 생각해. 친구를 죽인 살인자. 아니야?

약사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어.

소녀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아. 모두 그 애 편이야.

약사 누구 편도 아니다.

소녀 (말을 자르며) 내가 어떻게 당했는지 아무도 모르면서, 그 죽은 애가 남긴 일기장 하나 로 모두 날 괴롭혔어. 그 애가 쓴 일기가 모두 사실일까요? 살아있는 내 말은 믿지 않고, 죽은 그 애 말만 믿는 거죠?

약사 널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네가 이렇게 행동할수록 더 널 믿기 힘들어진 거 아닐까?

소녀 나도 괴로워요. 그 애 때문에. (사이) 그 애가 생각나고, 그 애한테 잘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가 잘 못 한 거 없어요. 그 애가 쓴 일기장 때문에 난 왜 평생 죄인처럼 살아야 하죠? 제가 그 친구한테 잘못 한 걸 보셨나요? 제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아요. 모두들 귀찮으니까, 남의 일이니까, 쉽게 생각하고, 쉽게 말하는 거죠.

약사 네 상황을 잘 설명하는 건 어떨까?

소녀 누가 믿죠? 아저씨도, 선생님도, 엄마도, 모두 그 애가 쓴 일기장으로 절 판단하는데! 그 애가 쓴 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하기도 전에, 저한테 모든 걸 덮어씌우는데, 뭘 설명하라는 거죠. 네?

약사 미안하다.

소녀 됐어요. 모두 내 말은 들으려 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않으니까.

약사 아니다. 다들 네 걱정을 하고 있어.

소녀 귀찮으니까. 일이 커지는 게 싫으니까. 걱정하는 척하는 거야. 아저씨도 마찬가지잖아요.

소녀는 휴대전화를 들고 자신을 찍는다. 소녀는 문자를 보낸다.

약사 뭐하니?

소녀 곧 알게 될 거에요.

약사는 소녀의 휴대전화를 뺏으려 한다.

소녀 뭐가 겁나신 거죠?

약사 네 의도가 뭐냐?

소녀 아무 것도 없어요. 내 입장이 돼야 날 이해할 수 있으니까. 이제 모두들 나타나겠죠?

약사 너 진짜 왜 그래?

소녀 제가 없어지면, 제가 보낸 문자를 모두 믿을 거에요.

약사 뭐라고 보냈는데.

소녀 궁금하셔도 참으세요. 내일이면 모두가 아저씨한테 물을 거에요. 제가 왜 죽었는지, 아저씨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저씨는 저한테 도움을 안 준 걸 후회하면서 살 거에요.

약사 사실이 아니잖아.

소녀 사실과 진실, 어느 것도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만 관심이 있는 거죠.

소녀는 약국을 나간다. 약사는 소녀를 부르며 따라 나간다. 자동차가 급하게 서는 소리가 들린다. 약사는 전화를 건다.

약사 여보세요. 파출소죠? 약국인데요. 여학생이 약국을 나갔는데, 일을 저지를 것 같아요. 네? 무슨 관계냐구요? 손님이에요, 손님. 네. 그 손님이 죽으려고 해요. 네? 지금 일이 난 건 아니구요. 일 생기면 다시 전화하라구요? 아니, 지금 급해요. 그 손님을 찾아야 해요. 빨리 찾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라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가 끊어져 ‘뚜뚜’거리는 소리 들린다. 암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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