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의 책꽂이에는 전집류가 많은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집류 전성기의 책답게 하드커버에 비닐, 그 위에 다시 책갑까지 이중삼중의 겉치레를 한 요란한 모습으로 꽂혀있었지만 손이 간 것은 문고본의 작은 책들이었다. 전집은 양이 많아 부담스러운데다 포장이 너무나 과시적인 느낌을 주었나 보다. 출판사 이름은 잊었지만 노란바탕에 예쁜 그림이 그려진 세계명작문고의 ‘마경천리’, ‘암굴왕’, ‘보물섬’ 등은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그 책들 가운데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읽은 후 한동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게는 이게 허구인지 사실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떤 무서운 병이 있어서 그 병에 걸리면 평범한 사람도 밤만 되면 흉악한 괴물이 되어 사람을 해친다는 내용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밤이면 괴물로 변할까 봐 두려워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악몽에 시달리다 깨면 팔다리를 만지며 괴물이 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안심하곤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던 어린 시절의 공포는 얼마 뒤에 풀렸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보물섬’을 쓴 영국인 소설가 스티븐슨이 쓴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 느낀 안도감은 어리석었다는 자책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후 밤에 잠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악몽에 시달리지도 않게 되었지만, 스티븐슨은 왜 그런 끔찍한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은 머릿속 한구석에 오래 남아 있었다. 고전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재해석되고 개인의 경우에도 인간적 성장과 변화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무 어릴 적에 축약판으로 고전을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나의 경우를 통해 종종 해본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인간의 양면성 또는 이중인격과 현대인의 성격분열, 자신의 진정한 자아 안에 내재하는 제2의 자아에게 쫓기는 한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사실에 쉽게 공감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청소년기를 생각 없이 보낸 탓인지 아니면 입시 위주의 교육에 휩쓸린 때문인지 모르겠다.
점차 세파에 시달리며 여러 일을 겪게 되니 조금은 알게 되었다. 세상은 두부 모 자르듯 선과 악, 민주 대 반민주, 적군과 아군으로 나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인간은 이중성만이 아니라 다중성을 가진 복잡한 존재임도 알게 되었다. 조폭도 집에서는 자상한 가장이자 부인에게 바가지 긁히는 소심한 남편일 수 있으며, 선량한 회사원이 집에서는 폭군일 수도 있고 치한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된 것이다. 자상한 어머니가 둘도 없이 모진 시어머니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 후의 세상은 그 이전과 같기 어렵다.
오랜 시간 신용을 쌓아 지역에서 인심을 얻은 사람이 주변 사람에게서 모은 거액을 들고 도주하였다는 기사를 볼 때면 “사람들이 남을 잘 믿는군” 정도의 생각이었다. 인간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다 사기 당하는 경우는 동네 시장통에서나 있을 수 있는 얘기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일은 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실감한다.
최근 내가 속해 있는 단체에 문제가 생겨 해결하느라 근 일 년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도 커다란 일이 발생하여 해결 방법을 찾느라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던 기억이 새롭다. 난제가 풀려갈 때면 모두 자기 일처럼 함께 기뻐했었는데 지금은 의기투합했던 동지(?)들과 마주보는 상대가 되어 불편한 모습으로 조우하게 되었다. 그들이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새삼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떠오른다. 개인의 입장은 사안과 경우마다 다르고 그럴 때면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바람직한 결말이 이루어지고 새해에는 사람 때문에 섭섭한 일이 적어지길 바랄 따름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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