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만 일곱인 막내아들을 ‘진짜 남자’로 만든 아버지의 삶”
고등학교 때 나의 별명은 ‘아부지’였다. 삼년 내내 어른들이 입는 바지를 입고 다닌 때문이었다. 바지의 출처는 자형들이었다. 어머니가 자형들이 입던 옷을 내 체형에 맞춰 수선해서 나에게 입혔다. 바지는 차고 넘쳤다. 누나가 일곱이니까.
제일 큰누님은 나보다 열일곱 살이 많았고, 막내누나도 네 살이나 터울이 났다.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셨을 즈음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나를 지우려고 했었다고 한다. 물론 아들인 줄 알았다면 판단이 달랐을 것이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장손이었다. 장손이 된 과정이 우리 역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육이오전쟁이 터지면서 큰할아버지의 아들 둘과 할아버지의 첫째아들이 모두 전사했다. 1.4후퇴 때 중공군에 포위되어서 국군이 대량학살 됐는데, 모두 거기에서 전사하셨다고 들었다. 남자 셋이 몰살당하고 나자 아버지가 큰할아버지 댁에 양자로 갔다. 장손이 딸만 내리 일곱을 낳았으니 얼마나 아들을 기다리셨을까.
“꿈자리가 묘합디더.”
나를 지우려고 하기 하루 전날,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과수원에서 기린이며 사자며 짐승들이 서서 울고 있더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아들이란 확신이 들더라고 했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말에 수긍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임신 6개월 즈음 어머니가 복통을 호소했다. 몸에 열이 나더니 눈알에 노란 기운이 감돌았다.
“유산부터 하셔야 합니다. 그런 후에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성공한다곤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병원으로서도 난감했던 모양이다. 당시 의학 기술로는 담낭염 하나만 해도 벅찬데 거기다 임신까지 했으니 의사도 선뜻 손을 대기가 힘들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이철 외과’이란 곳을 찾아냈다. 원장이 “당장 환자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거기서 수술을 했다. 대수술이었다. 일단 자궁을 꺼내놓고 담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제거한 뒤 다시 자궁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목숨입니다. 잘 사십시오.”
요컨대, 나는 두 번의 위기를 겪고서야 겨우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니 덕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전쟁 터져서 집안에 남자란 남자는 다 죽고 나만 겨우 살아남았는데, 내가 집안의 대를 끊을 뻔했으니 얼마나 조마조마했겠냐. 어려서부터 고생한 게 니 덕에 다 풀렸다. 고맙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효도라고도 하셨다. 나로선 황송하기 그지없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면 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거나 다름없었단 생각도 종종 든다. 자식도 여덟이고 동생까지도 뒷바라지해야 했지만, 아버지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부족함이 없도록 살게 해주려고 자신을 희생하셨다. 내가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조아려지는 이유다.
교문 앞에서 또래 아이들에게 엿을 판 아버지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면 할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아버지는 해방되기 전 일본에 가셨다. 강제징용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거기서 막일을 하셨다는데, 돈도 어느 정도 버셨던 모양이다. 해방 후 귀국을 하셨다. 대구로 오려고 했으나 그 즈음 대구에 호열자가 돌아서 하는 수 없이 군위로 내려가셨다. 이때 할아버지가 실수를 하셨다. 일본에서 번돈으로 땅을 샀으면 좋았을 텐데, 누나(아버지의 큰고모)에게 돈을 맡기고 조금씩 타서 썼다. 1~2년 사이에 맡긴 돈은 모두 사라졌다. 형제 사이에 따지고 들 수도 없어 아무 말 못하고 대구로 이사를 했다. 먹고 살 길을 찾아서.
비산동에 단칸방을 마련해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내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까지 모두 그곳에서 기거했다. 아직 전쟁 전이었고, 아버지는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였다.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 밖으로 나가 일을 했다. 아버지가 맨 처음 한 일은 구두닦이였다.
“구두닦이도 구두 통 들었다고 다 되는 게 아이더라. 일 년 동안 나이 많은 애들한테 맞기만 했다.”
구두닦이마다 구역이 있었다고 했다. 일정한 구역을 몇 명이 맡아서 ‘장사’를 했는데, 아버지가 구역을 침범한 거였다. 아버지는 일 년 가까이 매일 맞았다고 했다. 그 정도 버티고 나자 그중에서 제일 나이 많은 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니 진짜 독하다. 니를 쫓아낼라 카다가는 내가 이승 하직하겠다.”
아버지는 구두닦이 일이 끝나면 매일 엿을 샀다. 그걸 먹지 않고 곱게 싸서 집으로 들고 왔다. 매일 그렇게 하자 한번은 엿장수 아저씨가 이렇게 물었다.
“니가 먹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매일 엿을 사노?”
“아부지 드릴라꼬예. 아버지가 속병이 좀 있으신데, 단 거를 먹으면 속이 가라앉는다고 하셔가꼬예.”할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 속병을 얻었다. 병 때문에 귀국 후에는 일도 거의 못하셨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엿장수 아저씨는 아버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돈은 됐다. 그냥 가가라.”
그 뒤로 엿장수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일자리도 소개받았다.
“엿을 떼서 팔면 구두닦이보다 나을 끼다. 이거 해봐라.”
새벽 일찍 엿을 떼 와서 작은 구멍가게 여러 곳에 대고 아침이 되면 초등학교 앞에서 엿을 파는 일이었다. 몸은 훨씬 편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들어가는데 교문 앞에 엿판을 메고 선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때 ‘우리 집 참 못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아버지가 엿장수 다음으로 한 일은 사제담배였다. 불법이었지만 4.19 전에는 암묵적으로 행해지던 일이었다. 십대 중반쯤 나이에 아버지는 나름 열댓 명의 공원을 거느리는 공장장의 지위까지 올랐다. 손재주도 좋았지만 아버지의 특별한 재주가 생산 효율을 높이는데 기여한 까닭이었다. 그 특별한 재주는 재밌는 이야기로 직원들의 잠을 깨우는 것이었다.
담배를 만드는 일은 단순 노동이었다. 특수종이에 담뱃잎을 깔고 돌돌 말아서 풀로 붙인 뒤 손에 쥐기 편한 크기로 자르는 작업이었다. 워낙 무미건조하다보니 직원들이 일을 하다가 꾸벅꾸벅졸기 일쑤였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가 저녁에 대중소설을 외워서 그걸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줬다. 그러자 직원들이 더 이상 졸지도 않았고 작업장 분위기가 좋아졌다. 덩달아 생산량도 몇 배나 늘었다. 이를 본 사장이 아버지에게 관리직을 맡긴 것이었다.
벌이가 제법 되긴 했지만 4.19를 즈음해 담배 만드는 일은 그만뒀다. 법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커져서 법을 보다 엄격하게 지키기 시작했고, 사제담배도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끝까지 그 일을 손에 놓지 않는 이들도 많았지만 아버지는 서둘러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텃새 강한 안동에서 ‘마을 영웅’에 등극한 사연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오긴 했지만 아버지의 수중엔 돈이 없었다. 그동안 번 돈은 모두 가족들 뒷바라지에 쓴 뒤였다. 그 즈음 나의 첫째 누나가 태어났다.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머슴을 살려고 진외가집으로 갔다. 진외가 아제와 첫 대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친척이긴 했지만 촌수가 멀어서 고용을 안 해줄 수도 있었다.
아제가 물었다.
“전에 무슨 일을 했는공?”
농사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몸을 쓰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고 사실대로 고했다가는 돌아가라고 할 것 같아 거짓말을 했다.
“막노동을 했습니다.”
아제가 미심쩍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차 통과. 다시 날카로운 질문이 들어왔다.
“돈은 얼마나 주면 되겠는공?”
액수를 불렀다간 일을 해보기도 전에 쫓겨날 수도 있겠다 싶어 다시 머리를 썼다.
“일 하는 만큼 주십시오.”
아제가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 합격이었다.
다음 날부터 아버지는 새벽 세 시에 일어났다. 재 너머에 가서 물을 길어와 물독을 채우고 소죽을 끓였다. 아침까지 물을 길었다. 식후에는 들로 나가 하루 종일 논과 밭에서 일했다. 저녁엔 늦도록 새끼를 꼬았다. 그렇게 꼬박 두 달을 일하고 나자 그 아제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다.
“잘하는 건 아닌데, 참 열심히 하네.”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그때서야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처자가 있습니더. 여서 같이 살아도 되겠습니꺼.”
아재는 선선히 허락을 했다.
“그래, 오라 캐라.”
어머니가 집에 오자 아지매가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시내에서만 생활해서 시골 일은 잘 못할 거라고 여긴 탓이었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가족들과 일꾼, 모두 열두 명의 식사와 빨래를 거뜬히 해결했다. 두 달이 지나자 어머니를 보는 진외가 아지매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합격점을 받은 거였다.
부모님은 이 년을 꼬박 일한 뒤에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그후 칠곡으로 가서 사과농사를 짓기로 했다. 진외가에서 일하면서 사과농사를 배웠던 것이다.
땀 흘려 농사지어 놨더니, 느닷없이 압류...
칠곡으로 가서 도지를 얻었다. 도지란 것은 돈을 얼마쯤 내고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은 후 그 수확물을 집주인과 반반 나누는 거였다. 계약서를 쓰고 비료까지 다 뿌렸는데, 땅주인이 나타났다. 아버지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연은 이랬다. 아버지가 도지로 땅을 얻을 즈음에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이전 땅주인이 그 사실을 숨긴 것이었다. 그 사이 비료를 사는데 들인 돈이며 투자한 시간과 노동이 하릴없이 날아가 버릴 판이었다. 아버지는 새 땅주인을 찾아갔다. 그러자 주인은 순순히 이렇게 대답했다.
“일단 농사지으십시오. 괜찮습니다.”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가을에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수확한 사과에 압류가 들어온 것이었다. 새 땅주인은 그걸 알면서도 아버지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했던 거였다. 어찌 보면 두 번째 땅주인이 진짜 사기꾼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빈손으로 쫓겨나는 수밖엔.
아버지는 안동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다시 빚을 내어 사과밭 도지를 얻었다. 문제는 밭이 너무 황폐했단 거였다. 도지로만 돌리던 땅이다 보니 당장의 수확에만 신경을 썼을 뿐 멀리 보고 땅심을 키운 이가 없었다. 여기서도 어떻게 보면 속은 거였다. 밭 같지도 않은 밭을 도지로 얻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마을에 진작부터 “타지인이라서 아무 것도 모르고 속았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한다.
불미스럽게 시작됐지만, 안동에서 아버지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무를 정성스레 가꾸고 땅심을 돋우어서 밭을 황금밭으로 바꾸었다. 3년이 걸렸다. 사과 중에서 국광 품종은 한 상자에 80개 정도 들어가면 상품으로 쳤는데, 아버지가 수확한 사과는 60개 정도밖에 안 들어갈 정도로 알이 굵었다. 최상품이 나왔던 것이다.
창고도 지었다. 밭주인에게 “돈을 반반씩 내서 짓자”고 제의했고 흔쾌히 “그러자”는 답을 얻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멘트와 강모래를 이용해 두 분의 힘만으로 벽돌을 만들어 창고를 짓게 되었다. 창고를 지어놓으면 출하시기를 조절할 수 있어서 사과를 훨씬 좋은 값에 팔 수 있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했다. 사과를 농협에 납품하지 않고 서울 청과 도매상에 직접 가지고 올라간 것이었다. 유통단계를 줄여 훨씬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마을에 퍼졌다. 타지 사람이라고 텃세를 부리던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마을 사과를 모두 거두어서 서울에서 팔아다 주곤 하셨다. 마을 자체의 소득이 확 올라갔다. 불과 오 년도 안 되어서 아버지는 이방인에서 마을의 리더가 되셨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초반, 아버지는 다시 상주로 이사를 했다. 안동 밭은 팔아서 처분하고 빚을 내어 상주에 밭을 샀다. 1만 4000평짜리 큰 밭이었다. 사서 보니 거기도 모래밭이라 땅심이 부족했다. 아버지는 모래밭에다가 산 흙을 사들여 부었다. 산에 터널을 뚫거나 골재를 채취하면서 나온 흙이었다. 몇 년에 걸쳐 밭 모양을 만든 뒤 제대로 된 수확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또한 사과 과실주를 만드는 용으로 쓰는,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사과를 생산해 일본에 수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새로운 작물 하나를 더 심었다. 수박이었다. 그 즈음 전국에 사과밭이 늘어나 사과 값이 계속 하락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수박으로 고소득을 노린 것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즈음해서는 수박 값도 하락세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양계장을 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시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시는 분이셨다. 주말이나 방학이 오면 아버지가 일을 하시는 걸 옆에서 거들며 자연스럽게 지켜봐왔다.
아버지는 정성스럽게 닭을 돌보았다. 닭은 추우면 잘 죽고 병들기 때문에 늘 온도를 올려주어야 한다. 닭똥 냄새가 진동하는 양계장 안에서 기계가 자동으로 모이를 주고 있는데도 굳이 일일이 손으로 구석구석 모이를 놓아주며 양계장을 한 바퀴 돌았다. 계사를 청소할 때는 닭똥 물을 다 뒤집어쓰기 일쑤였고 날씨가 너무 더운 여름에는 고온으로 닭들이 폐사할까 양계장 온도를 낮추기 위해 지붕에 물을 뿌리고 선풍기를 틀고 안간힘을 쓰셨다. 알뜰하게 닭을 돌본 덕에 닭들은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랐고 무게도 많이 나가 소득도 좋았다. 우수농가로 도지사 표창도 받으셨다.
열심히 벌었지만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았다. 자식이 여덟에다 삼촌 둘과 고모까지 뒷바라지해야했다. 동생들 결혼시키고 먹고살 길을 마련하는데도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집안에 돈이 고일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셨던 이유다.
누나 일곱 있는 덕에 4년 동안 반장
2002년, 아버지는 오랜 시골 생활을 접고 드디어 대구에 오셨다. 대구에서는 취미삼아 게이트볼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게이트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판 자격증을 땄다.
보통 10년을 게이트볼 하신 분도 합격하기 힘든 시험이라고 한다. 거기다 몇 해 안 가 대구광역시 게이트볼연합회 경기위원장과 부회장자리까지 꿰찼다. 이 역시 10년 넘게 활동한 이들도 얻기 힘든 자리라고 한다. 안동에 계실 때도 서울 청과도매시장에 거래를 터서 인근 마을의 소득 수준을 높였다. 그때도 명실공히 마을의 대표 인사였다.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형편이 되어 학교만 제대로 다녔다면 국회의원도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못 배운 설움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누나들과 나를 모두 어릴 때부터 대구로 내보내 교육을 시켰다. 나는 여덟 살 때 대구로 나왔다. 누나들 밑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셈이다.
학기 중에는 대구에서 지냈지만 방학 땐 한 달 내내 시골에 내려가 지냈다. 시골에 가면 늘 아버지 일을 도왔다.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사시는지 뼈저리게 느꼈고, 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비교적 모범적인 학교생활을한 정신적 비결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다보니 체력이 좋아진 것도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 체력이 좋으면 집중력도 덩달아 좋아진다. 나는 수업 시간에 졸거나 선생님이 강조하는 포인트를 놓친 적이 없었다. 무한체력 덕분이었다. 시험 기간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험 기간 내내 밤을 새다시피 공부를 해도 지치지 않았다. 시험 기간에 하는 공부는 거의 100% 성적으로 흡수된다. 체력이 좋은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내 공부에 대해 관여하지도 코치하지도 않았지만, 내 성적은 아버지의 공이 8할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누나가 일곱 명이라는 것도 손해날 건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장 선거에 나가서 반장이 되었는데, 그때 누나들을 활용했다. 선거 운동에 동원한 것이 아니고, 큰누나가 대학시절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될 때 쓴 선거 전략에서 후보 연설 의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큰누나는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동생이 일곱 명인 딸부잣집 맏딸이다. 총학에서도 큰언니 역할을 톡톡히 하겠다”는 요지의 후보연설을 했다. 그 결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됐다. 나는 누나들과의 에피소드를 인용하면서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잘 안다”고 호소해 반장에 당선되었다. 그후 나를 믿어주는 아버지 같으셨던 담임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힘든 일에 항상 앞장서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도 묵묵히 하는 어른스러운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나는 6학년 때까지 한해도 빠지지 않고 반장이나 부반장을 맡았다.
선거 전략은 누나에게 배웠지만, 리더십은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늘 강하게 키우려고 하셨다. 어릴 때 걷다가 넘어져 울어도 절대 일으켜 세우는 법이 없었다. 눈물이라도 보이면 “남들이 울면 달래야지 약해지면 안 된다”고 타일렀다. 막내였지만 친구들에게 나는 맏이 같은 느낌이 든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의사가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형편이 조금 풀리자 늘 주변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마을 일꾼을 자처해 서울 청과에 마을에서 난 사과를 모두 싣고 올라가는 수고를 하신 것도 그렇지만, 상주에 계실 때는 마을 노인정 겨울철 난방비는 아버지가 책임지셨고 라이온스 클럽 같은 봉사단체 활동도 열심히 하셨다. 집에는 표창장과 감사패가 걸려 있다. 그걸 보면서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인색했지만 남들에겐 베풀며 살아오신 사람이었단 걸 느끼게 된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즈음 ‘이철 외과’의 이철 원장님이 떠올랐다. 그분이 없었더라면 나는 세상에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 의사가 딱 좋네. 본분에 충실한 것 자체가 봉사활동이니까!”
나이가 들면 아프리카 같은 곳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차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갈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도 아버지가 물려주신 정신적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괴로워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생의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한참이 지나면 깨달을 수 있다. 생은 난처한 사건의 연속이라는 오래된 가르침을 기억하라.’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우연히 접한 인디언 격언이다. 내 아버지의 삶이 저 한 마디안에 다 담긴 느낌이다.
6.25전쟁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기둥 역할을 했다. 이후 난처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한 사람의 생에 그만큼의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러나 아버지는 불평하지 않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쓰면서 충실하게 살아오셨다. 어떤 이에게는 단순히 삶을 파괴하거나 어지럽히기만 하는 걸림돌이었겠지만 아버지는 특유의 성실성과 강인한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결국 디딤돌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나약하거나 포기하기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사셨을 것이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건 없으니까. 결국, 괴로워 도망치고 싶은 순간을 생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으로 바꾼 것은 아버지의 삶의 태도였다. ‘끝이 좋으면 다좋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인내와 땀으로 ‘좋은 끝’을 완성하셨고, 그 덕에 난관들이 모두 필요한 순간으로 탈바꿈했다.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숙여진다.
나도 아버지처럼 살려고 노력 중이다. 좋으면 좋은 대로 받아들이고, 안 좋은일이 오면 삶에서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내고 싶다. - 아버지처럼. 그것이 아버지가 몸소 가르쳐 주신 가장 훌륭한 삶의 방식이자 내 자식들에게도 물려 주어야 할 우리 가문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믿는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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