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자원봉사 표창 받은 김현태씨
한국인 아버지에 일본인 어머니
‘왜놈’ 등 친구 놀림을 끈기로 극복
다문화 자녀들과 ‘봉사단’ 만들고
대학시절 2000시간 넘게 구슬땀
“혼혈도 다양성 관점으로는 장점”
올해 2030세대가 가장 공감한 단어로 ‘N포세대’가 꼽혔다. 포기한 게 너무 많아 셀 수도 없다는 의미다. 사회 양극화와 청년고용 악화로 청춘들에게 올 한 해는 ‘헬조선’으로 기억될 테지만, 그럼에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며 긍정의 에너지로 어려움을 헤쳐가고 있는 청년들을 본보가 찾았다. 일본인이라는 편견을 딛고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롤모델로 우뚝 서고, 수백번의 공모전 탈락을 딛고 성공한 청년사업가로 거듭난 이들은 “냉혹한 현실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청춘다운 패기로 맞설 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았다.
“현태가 중학교 때 싸움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요. 교실 유리창이 깨졌다고 청구서도 여러 번 날아왔다니까요.”
우다 에쯔꼬(60)씨가 아들 김현태(27)씨를 바라보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김씨는 쑥스러운 얼굴로 “쪽바리처럼 생겼다는 말은 참아도 가족까지 모욕하니 주먹이 날아갔던 거죠”라며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현태씨는 아버지가 한국인, 어머니는 일본인인 다문화가정 2세다. 학창시절 싸움을 일삼던 문제아는 지금 수백명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돌보는 ‘완득이 형’으로 거듭나 있다.
김씨는 다문화가정 출신 대학생들로 이뤄진 ‘다화봉사단’을 만든 공로로 지난 7일 서울시자원봉사 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어머니 에쯔꼬씨도 현재 다문화종합복지센터 이사로 다문화가정을 돌보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지난 23일 용산구 다문화종합복지센터에서 만난 이 모자는 “한국 생활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오기와 끈기로 극복해 다른 다문화가정에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김씨의 성장통은 남달랐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사 교사는 ‘왜놈’, ‘쪽바리’ 같은 단어를 노골적으로 사용했다. 친구들의 따돌림과 시비도 많았다. 강제징용과 위안부 역사를 배우면서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변화의 계기는 어머니와 함께 시작한 다문화가정 봉사활동이었다.
2011년 서울시립대에 입학한 김씨는 3년간 성북구다문화센터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멘토가 돼 주었다. 그러나 일반 대학생들이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혼란을 오롯이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인 다화봉사단은 현재 다문화가정 출신 대학생 멘토 30명과 중고등학생 100여명이 참가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대학생들은 매주 멘티 학생을 만나 학업 등을 돕고, 한 달에 한두 번은 캠핑, 자원봉사, 문화체험 등도 함께 한다. 김씨는 “편견과 차별에 위축돼 있던 아이들이 성공한 대학생을 만나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자원봉사를 하며 ‘나도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구나’라는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고 자평했다.
김씨가 대학 4년 동안 쏟아 부은 봉사시간은 2,000시간에 달한다. 1년에 100일 가량, 하루 5시간씩 일한 결과다. 봉사단 활동비를 모으기 위해 1년간 휴학하고 과외와 일본어 통번역, 영화관 아르바이트 등에 매진하느라 졸업도 늦어졌다.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다문화가정 출신이지만 그는 스스로를 N포세대로 규정해본 적이 없다. 그간의 봉사활동으로 무장된 긍정의 에너지 때문이다. “다양성의 관점으로 보면 혼혈도 장점이 됩니다. N포세대들 역시 남들과 비교하는 대신 자신의 장점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토닥토닥협동조합 대표 이영희씨
대학시절부터 공모전에 연속 낙방
좌절 않고 480회 도전 50회 입상
카페 형식의 ‘심리상담소’ 만들어
대구에서 청년 사업가로 맹활약
“실패서 얻은 경험이 삶의 원동력”
“제 삶의 원동력은 수많은 실패에서 얻은 경험입니다.”
24일 대구 중구 ‘토닥토닥’ 카페에서 만난 이영희(33) 토닥토닥협동조합 대표는 지역민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해주는 전문상담사다. 청소년과 대학생의 진로상담부터 노부부의 고민상담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이날도 11명이 그의 카페를 상담 차 다녀갔다.
이 대표는 2011년 ‘토닥토닥’ 1호점 오픈 이후 2개의 지점을 더 낼 정도로 대구 일대에서 성공한 청년 사업가로 꼽힌다. 월 평균 500여명이 상담을 요청하는 등 지역민 사이에 입소문도 난 편이다. 지금은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지만 그가 처음부터 비단길만 밟아온 것은 아니다.
방송사 PD를 꿈꿨던 이 대표는 한동대 재학시절 뮤직비디오 제작ㆍ마케팅ㆍ글쓰기 등 수많은 분야의 공모전에 도전했다. “당시엔 학벌이 부족하다고 느껴 ‘스펙’으로 극복하려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처음에는 20번 연속 낙방하며 좌절을 겪었다. 그래도 그는 끊임없이 도전했다. 480번의 공모전 도전을 거치는 사이 성공보다 실패의 경험에 집중했다. 그 결과 ‘학벌 불안감’을 극복했고, 50번 입상이라는 성과도 길어 올렸다. 이 대표는 “대입과 공모전을 거치며 실패를 경험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언론정보와 심리상담을 복수 전공했던 이 대표는 중도에 심리상담 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전공수업 시간에 정신병동 실습을 나갔다가 상담심리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는 그는 전문상담가가 되기 위해 석사과정에 진학하고 고생 끝에 한국상담학회가 발급하는 자격증도 취득했다. 3년간 2,000여만원의 자격증 취득 비용이 들었지만 그는 공모전 상금으로 이 시기를 버텨냈다. 이 대표는 “PD의 꿈을 접으면서 무용지물이 됐다고 생각했던 공모전 스펙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대학원 시절 일반인 500여명을 대상으로 전문적인 심리상담기관을 찾지 않는 이유에 대해 6개월간 조사한 결과, 카페를 가듯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심리상담소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그가 상담 카페를 차리려고 하자 지인들은 “대구에서 카페사업을 하면 망할 것”이라며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다시 도전의 길을 택했다. 그는 “대구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경직된 문화가 강한 지역이라 심리상담이 절박한 곳이라 판단했다”고 지역 사회에 뿌리내린 배경을 설명했다.
심각한 청년실업으로 체념과 자조, 심지어 ‘수저 계급론’ 같은 자학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 대표는 청년들에게 제대로 실패해 보라고 조언했다. “실패는 도전의 부산물일 뿐이에요. 스스로 발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좋겠어요.”
대구=김경준기자 fr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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