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거짓말이 세상을 어지럽혀
과장과 편향에 휩쓸리지 말아야
언제든 사람의 변화가 희망이다
다시 해가 저문다. 연초인 1월2일자 이 난의 ‘새해 첫 다짐’에서 우리사회의 최대 불행을 무슨 일이건 찬반으로 갈려 다투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건전한 공론(公論)을 위해 과장과 편향에 쉬이 올라타지 말고 거리를 두겠다는 개개인의 결단을 희망했다. 역시 헛되었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온통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뜻의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꼽았듯, 세상이 참 어수선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의 그늘이 걷히는가 싶더니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가 한동안 민심과 경제에 깊은 주름을 지웠다. 해묵은 여야의 정치적 갈등에 청와대와 여당, 야당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보태졌다.
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통한 정부ㆍ여당과 여론과의 갈등도 컸다. 5개 노동법안을 비롯한 쟁점법안을 둘러싼 여야 대결은 대통령과 국회의장의 갈등으로 번지고도 연내에 접점을 찾을 전망이 흐리다. 내년 4월13일 20대 총선에 적용할 선거구 획정을 두고도 여야가 이견을 좁히지 못해 ‘선거법 없는 선거’라는 정치적 위기를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이 일찌감치 3% 아래로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소득 분배구조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양질의 일자리는 좀체 늘지 않아 저소득층의 마지막 희망이 가물거린다. 청년 실업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는 가운데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수저계급론’이 화제가 되어 중간 이하 계층의 낙담을 부채질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상속 재산보다 기업과 가계,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평등한 소득분배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 또한 절망적 상황을 일깨우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영업자들의 잇따른 몰락, 고공행진을 거듭한 전셋값, 가파르게 늘어나는 가계부채, 노인 빈곤층의 뚜렷한 증가 등의 지표가 한결같이 일깨운 미래의 불안이 벌써 현재에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중국 발 미세먼지의 악영향을 포함해 숨쉬는 공기의 질마저 급격히 악화하고 있는데도 대책이 마땅찮다.
그런데도 개인적으로는 ‘헬조선’ 따위의 표현은 싫다. 행복은 성적 순(順)도 아니지만, 수치에 대한 기계적ㆍ수동적 반응도 아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사랑할 수 있는 주관적ㆍ능동적 능력’에 달렸다고 보았듯, 행복 또한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의 결과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도 제 입 하나 풀칠 하기에도 급급했던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릴 수 있다면,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최저 임금을 받아도 제 몸 하나 추스르기에 어려움이 없는 상태를 함부로 지옥이라고 규정할 이유가 없다. 동세대의 4분의 3이 대학에 가는 상황에서 그들 모두에게 과거 소수 대졸자들이 누렸던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세상은 애초에 없다. 그러니 부모 세대의 진정한 가책은 그런 일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녀 세대에게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보여주고 거기 이르지 못했다고 은근한 비난을 퍼부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 데서 비롯한다.
허구의 세계와 달리 세상의 진실은 대개 차갑다. 그 차가움이 싫어서 많은 사람들은 참말을 하지 않는다. 적당한 과장과 편향에 올라타 남의 탓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잠시 위안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과장과 편향은 결국 마음의 독으로 자라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죽인다.
과장과 편향의 궁극적 형태가 바로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에 몸과 마음을 싣고 펼친 대결과 갈등이 올해를 흔들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확신을 갖고 대결하고, 대결을 통해 다시 확신을 굳혀가는 듯한 악순환이 우리 사회에도 잇따르고 있다.
이런 거짓말과 결별, 참말을 하고 참말을 들으려면 그런 심리적 태도와 단절하려는 개인적 결단의 선행이 필요하다.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면서도 새해를 앞두고 다시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사람의 변화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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