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2015년 대한민국은 ‘혐오사회’였다. 온라인 공간에서 일부 이용자들이 '배설'에 가까운 실언을 쏟아내는 것이라 여겼던 혐오의 언어들은 이제 오프라인까지 점령할 만큼 매섭다. 여성을 향했던 혐오의 시선은 인종혐오, 이주민혐오, 동성애혐오 등으로 얼굴을 달리해 우리사회의 소수를 공격하고 있다. 올 한 해 우리 사회에 새겨진 혐오의 그림자를 돌아봤다.
● 대중문화에 스며든 여성혐오
'김치녀'로 대표됐던 여성혐오의 정서는 올해 들어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대중문화 영역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개그맨 장동민은 지난해 유세윤, 유상무 등과 함께 진행한 라디오 팟캐스트에서 여성을 노골적으로 비하한 발언이 뒤늦게 알려져 물의를 빚었다. 아이돌 그룹 위너의 멤버인 송민호도 여성혐오 랩 가사로 비판을 받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멘토인 작곡가 유희열은 여성비하 발언으로 뭇매를 맞기도 했다. (▶기사보기)
스타 몇몇의 성차별적 발언만이 문제가 아니다. 남성들간의 연대를 강조하고, 여성혐오를 부추기는 콘텐츠가 쏟아졌다.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남자끼리'나, XTM의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가 대표적이다. (▶칼럼보기) '여성혐오'의 논리를 대놓고 펼쳐 논란을 자초한 경우도 있다. 남성잡지 맥심은 성범죄를 미화하는 사진과 문구로 논란을 일으키며 국내외 여론의 호된 질타를 당했고, 결국 출판사 측은 해당 잡지를 전량 폐기했다.
● 분노한 여성들의 온오프 궐기
일부 남성들의 지속적인 여성혐오에 분노한 여성들의 무기는 '미러링(mirroring·거울처럼 똑같이 보여주기)'이었다. 지난 5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기승을 부릴 당시 인터넷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 메르스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메르스갤러리'는 본래의 취지와 달리 남성혐오의 진원지가 됐다. "메르스를 유포시키는 것도 다 김치녀"라는 일부 남성들의 여성 조롱에 여성들이 직접 '미러링'으로 반격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현재 '메갈리안(여성 혐오를 혐오하는 메갤 이용자)'이라는 이름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다. (▶기사보기)
메갈리안의 맞불 전략은 거침이 없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페이스북페이지 '김치녀' 등 대표적인 여성혐오 진원지에서 여성을 희화화한 언어의 주체를 남성으로 바꾼다. '가슴이 작은 여자는 매력이 없다'는 내용을 '성기가 작은 남성은 매력이 없다'고 바꾸는 식이다. '김치녀(허영심 많은 한국 여성을 일컫는 말)'는 '한남충(벌레 같은 한국 남성)'으로, '삼일한(한국여자는 3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에는 '숨쉴한(한국남자는 숨쉴 때마다 한 번씩 때려야 한다)'으로 맞선다. (▶기사보기)
분노에 찬 여성들의 목소리는 온라인 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퍼지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는 미러링 잡지 '사심'을 격월로 발간하고 있다. 사심은 '여성들을 위한 여성의 잡지'를 모토로 그동안 차별 받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저널이었던 '이프'도 9년 만에 팟캐스트로 부활했다. 20대 페미니스트들의 활동도 두드러졌다. 정두리(26)는 여성을 위한 도색잡지 '젖은 잡지'를 내놓았고, 은하선(27)은 여성도 욕망을 솔직하게 털어놓자며 '이기적 섹스'를 출간했다. (▶정두리 인터뷰)
● '여성혐오 전쟁'은 현재진행형
여성혐오는 일상적 문제다. 여성은 늘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고,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해왔다. 최근의 여성혐오 현상이 결을 달리하는 건, 남성이 여성을 경쟁적 대상으로 여기는 데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여성혐오가 어쨌다고?'에서 "남녀 간의 임금격차, 빈곤의 여성화는 여전하지만 상대적으로 혹은 재현의 영역에서 성차별보다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의 격차가 가시화되자 일부 남성들은 계급적 처지를 젠더로 해결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기사보기)
여성들의 분노는 현실세계에서 작은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메갈리아, 여성시대 등 여성커뮤니티 회원들은 지하철, 버스, 백화점, 목욕탕 등 도처에 널린 몰래 카메라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대표적인 불법 음란물사이트인 '소라넷'을 폐쇄하기 위해 나섰고, 이에 경찰은 소라넷에 대한 수사 착수로 화답했다. 데이트폭력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여자친구를 감금 폭행한 조선대 의학전문대학원생 사건도 공론화했다.
● 혐오가 낳은 ‘혐오사회’
2015년, 한국을 '혐오사회'라 지칭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있다. 비단 남녀간의 이성혐오 전쟁 때문은 아니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세계 곳곳에서 벌인 테러행위 탓에, 국내에서도 이슬람 혐오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의 '초코바 논란'에서 보듯 다문화에 대한 반감도 노골화되고 있다. 비록, 살인사건의 동기는 아니었지만 '캣맘 혐오'는 일상적 이유로 퍼져있는 혐오의 단면을 보여줬다. (▶칼럼보기)
인터넷 상에서 혐오 표현도 크게 늘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지난 8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찾아내 콘텐츠 삭제·특정 계정 이용정지 등 시정요구를 한 건수는 2013년 622건, 2014년 705건, 2015년(11월 기준) 833건으로 매년 증가했다. 방통위가 규정한 혐오표현은 ‘합리적 근거 없이 인종, 성별, 출신지역, 장애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 경멸적인 표현을 사용해 배척하거나 일방적으로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내용’이다.
맘충, 노인충, 의전충…. 서로를 벌레로 칭하며 조롱하고 비하하고 멸시했던 올해가 지나가고 있다. 혐오의 칼날을 무디게 할 방법은 없을까. 최근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업체들은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을 보다 적극적으로 삭제할 방침을 밝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 규제는 세계적인 흐름이지만,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피하고 지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소리다.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명심해야 한다. 2015년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한 혐오는 약자 혹은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향한 ‘비겁한 폭력’일 뿐이란 점이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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