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증거와 문서가 필요하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이 말은 여론을 이끌기 위해 프레임을 선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누군가 어떤 문제에 대해 “그것은 A다”라고 얘기하면, 이에 대한 반대의견은 B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A를 반박하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최근 가장 큰 이슈인 서울역 고가도로 사업은 왜곡된 프레임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서울역 고가가 폐쇄된 13일 이후부터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권 욕심이 교통난을 불러왔다는 논조의 칼럼과 기사가 적잖이 쏟아지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계천 사업을 진행한 것에 서울역 고가도로를 중첩시킨 결과다. 실제 그런 의중이 있었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지만, 이런 기사들이 우려되는 건 정작 제일 중요한 문제인 고가의 안전성을 내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역 고가는 2012년 안전 진단에서 붕괴 우려가 있는 D등급을 받았다. 당시 잔존 수명을 3년으로 봤는데, 2015년 말까지는 어쨌건 폐쇄해야만 한다. 노후화된 세월호로 인한 참사가 아직도 생생한데, 안전문제를 교통문제로 받아치며 대권을 운운하는 논리는 자못 놀랍기까지 하다.
도심의 주요 도로를 굳이 공원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지적 역시 생뚱맞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서울시에 원죄가 있다. 애초에 서울시가 미국 하이라인 파크를 모델로 “공원화를 검토하고 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역 고가도로는 도로법상 ‘도로’에 속한다. 용도를 변경하기 어렵다. 또한 서울시 역시 서울 도심에 17개 보행축을 만드는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역 고가도로 사업을 보고 있어서, 공원을 만들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건 애당초 맞지 않는 논쟁이다. 차로를 그냥 폐쇄할 것이냐 보행길로 전환할 것이냐 하는 게 올바른 방정식이다.
마포부터 만리재를 지나 숭례문을 잇는 길은 한양도성도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보행길이다. 그러던 것이 서울역이 생기면서 보행축이 끊겼다. 사람들은 숭례문으로 가기 위해 철로를 지나치거나 다른 곳으로 멀리 우회해야만 했다. 지금도 서울역 서부교차로에서 서울스퀘어 인근으로 가려면 400m 남짓한 직선거리를 6개의 횡단보도와 지하도를 건너가며 1㎞ 이상을 가야 한다. 1970년 서울역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이 다시 생겼지만, 그건 온전히 자동차의 몫이었다. 자동차가 곧 도시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시기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보행길은 사라졌다.
지금은 속도전을 내세웠던 근대화의 시기가 아니다. 전세계 도시의 관심은 차량에서 사람으로 이동하고 있고, 노후화된 도시를 어떻게 재생할 것이냐에 쏠려있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보행길로 전환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논쟁거리로 다루어야 한다. 보행 적합성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공원’이라는 잘못된 시각으로 문제를 협소하게 끌고 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 재생과 도시 회복력 복원, 걷고 싶은 도시라는 새로운 화두로 논의를 확장해야 할 시기 아닌가.
그렇다고 서울시의 보행축 복원 계획이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그간 서울역 고가도로 사업에는 시민들의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서울시야 고가 폐쇄 시점이 걸려 있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시민들이 더 많은 소통을 원한다는 방증으로 읽어야 한다. 특히 고가도로 보행길 전환은 서울시가 계획하고 있는 17개 보행축 복원, 도시 재생과 같은 굵직한 변화와 얽히고 설켜있어 끊임없이 의견을 물어야 한다. 시민들의 참여와 동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그건 고가가 만들어진 1970년과 다르지 않다. 더 많은 의견을 담아내기 위해 소통을 확대하는 틀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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