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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철이 만난 아름다운 한국인] 한국의 美를 찾는 김옥희 대표(일본 Nenrin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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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철이 만난 아름다운 한국인] 한국의 美를 찾는 김옥희 대표(일본 Nenrin인터내셔널)

입력
2015.12.24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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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될 뻔한 김기창 천경자 화백 작품 발굴로 미술품 거래에 관심, 조선백자의 진수 ‘달항아리’ 등 100여점 찾아 조국 품으로 돌려보내

◇30년전 온가족과 함께 일본 이민, 교포들의 후원 덕분으로 입지 다져... “받은 성원을 이제 조국의 품으로” 한국서 문화공부하며 새 역할 구상

◇“인생에 의미 있는 일 하고 싶다” 교포들의 귀향을 위한 ‘둥지’ 모색... 일본내 문화재 반환운동에도 관심 “한국인 긍지살릴 문화운동 벌일 터”

―도쿄 뒷골목 고물상에 처박힌 ‘한국미술의 거장’

1990년대 중반. 일본에 살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랠 겸, 또한 운영하는 한국식당과 사는 집의 인테리어 소품을 찾아볼 겸 틈틈이 도쿄의 고가구점을 들르던 30대 중반의 불고기집 한국식당여주인에게 조금은 낯익은 화가의 그림 작품이 발견됐다.

김기창... 천경자...

지금이야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한국 미술계의 거목들이지만, 당시 일본에 살던 김옥희 대표에게는 그저 이름 석 자를 들어 봤을 정도의 고국 화가일 뿐이었다.

그러나 낙관과 사인이 분명한 ‘한국화가의 작품’이 낯선 이국땅의 고물상 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고가구점 주인에게 “어디서 나왔느냐?”며 출처의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집 뜯는데서 나왔습니다. 그냥 버릴 수 없어 폐가구들을 실어 올 때 같이 가져 오게 됐지요”

일본인 고가구점 주인은 그 화가가 어느 나라 누구인지 알 리 없었다. 잘못하면 한국 화가의 작품 두 점이 신문폐지 재활용장에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들어 “그림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은 흔쾌히 “그냥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단골이기도 했지만 “하찮아도 버리기는 아까웠는데 잘됐다”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남의 것을 어떻게 그냥 가져가느냐?”는 핀잔 섞인 항의에 주인은 “그럼 1,000엔만 주고 가라”했고, 결국 2,000엔을 손에 쥐어주고 김기창과 천경자의 그 그림들을 가져왔다.

김기창 화백의 작품은 ‘청록산수’였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은 물고기(잉어)를 그린 그림이었다.

나중에 이 작품들은 모두 한국으로 옮겨져 제대로 대우를 받게 됐지만, 어쩌면 고물상의 일반 폐지와 같이 사라질 수도 있었기에 김옥희 대표는 지금도 그 작품들이 자신의 눈에 띤 것에 안도하고 있다.

―한국식당 여주인을 문화애국자로 만든 사람들

20년 전 고물상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김옥희씨로 하여금 한국 문화와 한국의 美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미술품과 같은 예술품일수록 그 작품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보존할 수 있는 진정한 소장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한국의 예술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또한 새롭게 발견되는 우리의 고미술품 소장자는 한국인이 됐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평소에도 옛날 것을 좋아해 일본에 떠도는 우리의 도자기, 고가구, 고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그것이 계기가 돼 14년 전인 2001년경부터는 본격적인 고미술품 수집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 여기저기에는 한국도자기와 미술 작품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다.

그중 해방 전 일본에 유학을 왔거나 작품 전시회를 열었던 한국 유명 화가들의 작품도 있었다. 작품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뜻있는 재일 교포들이 조국의 가난한 미술학도들을 후원하자 그 답례로 그림을 선물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연세대에서 만난 금융인 출신 한국친구(우측 안혜경씨)와 함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며 ‘한국의 신문화’를 배울 예정이다.
연세대에서 만난 금융인 출신 한국친구(우측 안혜경씨)와 함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며 ‘한국의 신문화’를 배울 예정이다.

그런 분들이 1940년대에 일본 미술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했던 천경자 화백이었고, 일제하에서 조선 국전(선전)을 리드한 김기창 화백이었다.

또한 1970년대에 일본에서 모노파(派)를 이끈 이우환 화백과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위해 국내외에서 추상미술 운동을 전개한 박서보 화백의 작품들도 있었다. 그래서 20년 전 ‘고물상 그림’의 현재 소재를 물어 보았다.

“그 그림들을 제가 계속 소장할 수는 없었어요. 어차피 진짜 주인이 나오면 내주려고 잠시 보관한 작품이었으니까. 천경자 선생님 작품은 어느 개인이, 운보(김기창)의 작품은 청주 운보의집 재단에 잘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 대표가 이처럼 한국의 도자기나 미술품을 수집해 진정한 주인을 찾아 조국으로 돌려주는 사업에는 1세대 재일교포들의 도움이 컸다. 또한 사진을 보내면 국내에서 가치를 감정해준 몇몇 분의 대학교수들도 큰 힘이 됐다.

그녀가 재일교포들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조국으로 돌려보낸 유명 미술작품들과 도자기들은 줄잡아 100여점에 이른다. 그중에는 그 유명한 조선백자 ‘달항아리’도 있다.

―국보급 문화재가 국내 감정에서 가짜로 판명되기도

그녀가 미술품을 보는 안목을 키운 것은 거의 독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술품 거래로 수익을 낼 수 있는 ‘프로’가 되기까지는 그 만큼의 노력이 더 필요했다. 처음에는 미술품 경매장에서 나온 책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예술품의 가치를 돈으로 논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딜러 입장에서 옥션의 책들은 거래가격까지 동시에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어요. 거기서 세계적인 한국화가인 이우환 화백과 박서보 화백의 작품도 만나게 됐던 것이지요.”

하지만 6~7년 전 옥션을 통해 구매한 작품이 가짜로 판명된 사례도 있다. 도시락용으로 사용하는 이조백자 ‘합’을 구매하고, 그 사진을 경희대 김대하 교수에게 보내보니 “진짜라면 전시회를 열만큼 국보급일 수도 있으니 당장 한국에 가져와 보라”는 답이 왔다.

하지만 경희대에서 과학적 측정기법 등을 총동원해 감정한 결과는 ‘가짜’였다. 그 이야기는 김대하 교수가 쓴 책 <골동 천일야화>에도 소개돼 있을 정도.

그 대신 미술작품은 대부분 재일교포 지인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런 교포 중에는 아버지와 같은 분도 계시다. 항상 남루한 옷차림으로 혼자 식당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곤 했는데, 홀로 사시는 것 같은 그 분에게 밑반찬도 싸드리는 등 작은 정성이라도 드리려 했더니 나중에 큰 후원자 돼주셨다고 한다.

“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그래서 저 역시 세상에 태어나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한두 가지는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평소 생각해온 것은, 아직은 막연한 구상이지만 재일교포들의 귀향을 위한 ‘둥지와 같은 쉼터’를 국내 어딘가에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을 위한 ‘독일마을’이 경남 남해에 세워진 것이 부럽기만 한 것이다.

“일본에 계신 1세대 교포 분들은 대부분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시는 분들이에요. 스스로 ‘반병신’이라고 하시니까. ‘왜요?’ 하고 여쭈면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에 오면 한국인도 아닌 중간치 반병신 취급을 받는다’고 하세요. 앞으로 그분들이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을 마감하신다고 하면 그분들의 유해라도 고국에 모시고 싶어요.”

그런 심정 때문일까. 시인 정연복은 “아무리 외로운 떠돌이 인생이더라도 태어난 고향이 없는 사람은 없고, 아무리 볼품없는 인생이라고 해도 나를 낳아 준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향과 엄마’)고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일본 땅에서 생활해 온 교포들에게 고향은 언제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영원한 사랑과 그리움의 테마였다. 1960년대 ‘조센징’이라는 차별을 피해 많은 교포들이 북송선을 탈 때 “북한으로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남아 계시다가 아직도 일본사회를 ‘반병신’으로 유랑하시는 분이 많다는 것이다.

연세대 문화예술최고경영자과정 졸업식장에서 졸업생 대표로 이두원 미래교육원장으로부터 수료패를 받고 있는 김옥희 대표
연세대 문화예술최고경영자과정 졸업식장에서 졸업생 대표로 이두원 미래교육원장으로부터 수료패를 받고 있는 김옥희 대표

―이제 재일교포들의 ‘귀향 둥지’를 꿈꾼다

“제가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가슴에 안고 올 때 달항아리와 많은 대화를 했어요. 그래 한국으로 가자. 우리가 있을 곳은 그곳이다!. 네가 일본으로 갈 때는 배를 타고 갔겠지만, 이제는 비행기 타고 집으로 가는 거란다.”

그랬다. 고향으로 가자는 것은 한국에 새로운 터를 만들고 싶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도쿄대 홍종필 명예교수와 같이 일제 군군주의에 희생된 한국인들의 일본식 이름을 한국 본명으로 돌려놓은 작업을 하시는 분, 도쿄 오쿠라 호텔 뒤뜰에 있는 오층석탑이나, 오쿠라재단에 의해 해체돼 창고에 보관돼 있는 율리사지 탑의 반환을 위해 노력하시는 불교계 인사들이 이제는 김 대표의 롤 모델이 됐다.

결국 한국의 美를 찾는 것이 1세대 재일교포들에게 신세를 갚는 길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한국의 美를 일본에 알리는 일도 이제는 그녀가 담당해야 하는 과제가 됐다. 비록 미미할지라도 당신들의 노력으로 조국이 이만큼 살게 됐다는 자부심을 재일교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이제부터 내 삶을 살고 싶다”는 그녀의 간절한 제2인생의 꿈이다. 일본에서 잠자는 국보급 문화재를 찾는 작업, 또한 한국에서 봉사활동을 계획하는 것, 그녀가 연세대 문화예술최고경영자 과정에 등록한 것 모두 한국의 美를 보다 심도있게 탐구하고자 했던 이유다.

그 결과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대학캠퍼스에서 각계각층의 ‘동료 학생들’을 만나면서 ‘불금’을 알았고,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와 같은 다양한 ‘건배사’도 배웠으며, ‘번개모임’이라는 예상치 못한 만남도 경험했다.

이제는 노래방에서 ‘안동역에서’를 부르는 등 ‘새로운 한국 문화’를 너끈히 소화하는 김옥희 대표는 분명 본지가 선정하는 ‘2015년의 아름다운 한국인’이었다.

뷰티한국 편집부 cow242@beauty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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