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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실 없어 화장실로… 학생맘 안쓰러운 ‘녹초 육아’

입력
2015.12.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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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2곳 수유실 설치 8곳뿐

“가정ㆍ자녀 위해 학업중단 경험”

기혼학생 10명 중 7명 고충 토로

출산장려ㆍ고급인력 확충 위해

학생맘 보육환경부터 개선해야

연세대 신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홍정은(35)씨는 지난해 9월 둘째를 출산했다. 지방에 거주하는 부모님의 손을 빌릴 수도, 갓 태어난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길 형편도 안됐던 홍씨는 가을학기 내내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갔다. 캠퍼스 육아는 녹록지 않았다. 지도교수의 배려로 수업은 겨우 들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모유 수유를 하면서 불거졌다. 학교의 유일한 수유 공간인 연세ㆍ삼성학술정보관 5층 수유실은 우는 아들을 달래며 찾기엔 거리가 너무 멀어 결국 빈 동아리방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홍씨는 23일 “건물 지하의 어두컴컴한 동아리방을 전전하며 몰래 수유를 했다”며 “학생들이 덜컥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가슴 졸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최근 저출산 극복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공공기관과 기업들도 보육센터와 어린이집 설치 등 모성보호 방안을 마련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공부와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학생맘’의 경우 학내에 변변한 수유 공간 하나 없어 학업 단절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사회가 겉으로는 여권 신장을 외치면서 정작 미래의 여성 고급인력인 학생맘에 대한 배려에는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3월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가 전국 42개 주요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유실이 설치됐다고 응답한 곳은 8개교에 불과했다. 여성휴게실 등 대체시설을 제공하는 대학도 22곳에 그쳐 상당수 대학에서 학생맘의 모유 수유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열악한 환경 탓에 학생맘들은 오늘도 학교 곳곳을 떠돌며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다. 대학 재학 중이던 2013년 첫 아이를 낳은 김모(29)씨는 출산휴학 제도가 없어 하루 7시간 가량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다. 김씨는 “하루 한 두 번은 학교에서 유축을 했는데 수유실이 구비되지 않아 화장실을 찾아야 했다”며 “위생이 마음에 걸려 항상 손 소독제를 가지고 다니며 주변을 닦았다”고 회상했다. 이화여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오모(33)씨도 “상대적으로 깨끗한 교직원 화장실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급할 때는 인근 지하철역 수유실로 달려 갔다”고 했다. 이화여대는 학내 수유실이 2개이나 접근성이 좋은 캠퍼스 중앙의 수유실은 교직원 전용으로 제한돼 있다.

더 큰 문제는 학내 모성지원 시설 부족이 학업 포기나 단절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사회복지연구소가 조사한 여성 기혼학생 194명 중 70%는 ‘가정 및 자녀를 위해 학업을 중단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서울대 석사과정에 다니는 김모(38)씨는 “2010년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육아의 어려움 때문에 계속 휴학을 반복하다 보니 아직도 졸업을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모성보호에 손을 놓고 있는 국내 대학의 현실은 수십 개의 수유실을 갖춰 놓고 학생맘을 적극 지원하는 해외 대학들과도 크게 대비된다. 미국 하버드대와 시카고대는 각기 22곳, MIT는 16곳의 수유실이 캠퍼스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시카고대는 학생맘에게 별도의 연구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반면 국내 대학 중엔 서울대가 지난달 수유실 설치를 원하는 단과대에 최대 300만원의 예산을 보조하겠다고 밝힌 게 거의 유일한 지원책이다.

전문가들은 출산 장려와 여성 고급인력 확충의 양립을 위해서는 ‘워킹맘’의 전 단계인 학생맘의 보육 환경부터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영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학생맘은 사실상 다양한 연구활동에 참여하는 근로자로서 장차 우리나라 연구개발(R&D) 인력의 토대가 되는 자원”이라며 “국가적 인재를 기르는 차원에서 학생맘을 배려하는 제도와 시설 마련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국내 학생맘의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대학원이 다양해지고 늦깎이 여성 학생들이 늘면서 대학 사회에서 학생맘은 흔히 목격되고 있다.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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