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터졌다는 대형 뮤지컬의 흥행코드는 몇 가지 공식으로 집약된다. 달달한 러브 라인, 마약처럼 중독되는 킬링 넘버, 입 떡 벌어지는 화려한 무대, 무엇보다 우리 오빠(흥행 배우). 내년 2월 28일까지 LG아트센터에서 초연하는 대형 뮤지컬 ‘오케피’는 이런 공식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극중 연애는 지질하기 그지없고, 노래보다 이야기가 중심인데, 치열한 갈등조차 없다. 13명의 인물들이 정확히 13분의 1의 존재감으로 소소한 에피소드를 올망졸망 펼치는 지극히 일본스러운 작품은 연극 ‘웃음의 대학’으로 국내 알려진 일본 극작가 미타니 고우키가 대본을 썼다.
공연 시작 전 무대 한 가운데 우주선처럼 붕 뜬 보랏빛 오케스트라 피트에 실제 단원들이 악기를 조율하며 관객을 맞는다. 서곡이 연주되면 우주선 문이 열리듯 피트 주변을 둘러싼 무대 장치가 내려오고 그 아래에 또 다른 오케스트라 피트(오케피)가 펼쳐지며 실제 단원들에게는 장막이 쳐진다.
“꿈이 넘치는 것은 저 위쪽이죠. 여기는 그냥 현실 그 자체입니다. 화려한 세계와 붙어있어서 그런지 그 현실은 더욱 비참하게 느껴지죠. 그것이 바로 오케스트라 피트.” 턱시도를 차려 입은 컨덕터(지휘자)의 소개와 함께 뮤지컬 무대 아래, 오케피 속에서 활동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케스트라를 총괄하는 능력 있는 지휘자, 그와 별거 중인 아내 ‘바이올린’, 지휘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매력적인 ‘하프’, 남의 일에 관심 없고 묵묵히 자기 일만 하는 ‘오보에’, 돈 때문에 억지로 연주를 하는 ‘트럼펫’, 복잡한 대목에서는 연주하는 척만 하는 무능력자 ‘피아노’, 생활력 강한 가장 ‘드럼’, 아이들 도시락 찬거리 걱정에 여념 없는 ‘첼로’ 등 살면서 한 번쯤 만났을 법한 가장 보통의 삶이 오케피에 있다.
큰 틀의 대본과 음악을 제외하고 등장인물 이름, 무대 등 거의 모든 것을 한국에 맞게 다듬어 4시간이 훌쩍 넘는 원작을 2시간 50분으로 줄였다. 클래식, 재즈, 펑키, 발라드, 탱고 등 다종다양한 장르에도 불구하고 ‘한 방’이 없는 넘버와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천일야화처럼 이어지는 사연은 관객들을 사로잡기 어렵다.
다만 작품의 관전포인트는 관록 있는 배우들의 팀워크다. 컨덕터 황정민과 아내 박혜나는 능청스런 인간미를 불어 넣는다. 청순하게 니트 투피스를 차려 입은 하프 역의 윤공주는 수시로 팔을 들어 맨허리를 보이며 코믹 연기를 펼친다. 인생의 쓸쓸함과 절절한 부성애를 중후한 음색으로 열창한 ‘오보에’ 김태문은 뭉클함을 더한다.
“자랑할 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후회할 필요 없어. 그렇게 지금 난 여기 서있어. 그것이 인생이야.”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존재감을 보여주는 배우들을 따라 울고 웃으면 극중 노래 가사처럼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02)6925-5600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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