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첫 발을 내디뎠다. 베를린이 동서로 찢긴지 3년 만이다. 패전의 상흔과 분단의 혼돈이 도시를 휘감았고, 실업자 200만명이 거리를 떠돌던 때였다. 베를린이란 명칭이 붙었으나 사실 서베를린영화제였다. 미국과 서독은 동서냉전의 시기 자유주의 진영의 우월성을 알릴 수단이 필요했다. 서베를린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는 체제 홍보의 첨병으로 제격이었다.
정치적 의도로 출발했으나 베를린영화제는 세계적인 문화의 장으로 부상했다. 1970년대 문제적인 영화를 상영하며 세계 3대 영화제로 도약했다. 베트남전 시기 미군이 베트남 소녀를 강간하고 총살하는 내용을 다룬 서독영화 ‘O.K.’가 1970년 상영돼 논란이 일었다. 심사위원장인 미국 감독 조지 스티븐스는 격분했다. ‘젊은이의 양지’(1951) 등을 만들었고 미 육군에서 복무했던 이 유명 감독은 ‘전범’ 독일이 감히 미군의 전쟁범죄를 단죄하려 한다고 여겼다. ‘O.K.’가 경쟁부문에서 제외되지 않으면 심사위원장을 그만 두겠다고 영화제를 압박했다. 영화제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심사위원단 전원이 동반 퇴진했다.
하지만 후견인 미국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영화제의 행보는 계속됐다. 74년 구 소련영화가 처음으로 서베를린 스크린을 장식했다. 75년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등 동구권 영화들이 대거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헝가리 영화 ‘낙태’가 최고영예인 황금곰상을 받았다. 동서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베를린이라 해도 영화제에서만큼은 이념의 장벽이 없다는 선언이었다. 79년엔 미국영화 ‘디어헌터’가 갈등을 불렀다. 영화 속 베트남에 대한 묘사에 반발해 동구권에서 온 두 심사위원이 철수했다. 갈등을 마다하지 않으며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겠다는 ‘곰’(베를린영화제의 상징이다)의 뚝심은 영화제의 위상을 높였다.
다시 부산국제영화제가 위기를 맞고 있다. 부산시가 협찬중개수수료의 부실 지급을 문제 삼아 이용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모기 잡는데 망치 든 격이다. 퇴진 압박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망신 주기에 나섰다. 지난해 부산시의 만류에도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영화제가 상영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집행위원장이 퇴진하면 어떤 결과가 이어질까. 어느 집행위원장이든 상영작 선정에 부산시의 눈치를 볼 것이다. 세계 주요 영화제를 자부하는 부산영화제의 위상 추락도 불 보듯 뻔하다. 부산시는 무엇을 원하나. 부산국제영화제인가, 부산지역영화제인가.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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