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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읽고, 모임서 읽고, 아이랑 함께… 세 번은 읽는 셈이죠”

입력
2015.12.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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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자골목 안 늘푸른어린이도서관서

매주 금요일 오전 엄마들 모여 열독

아이들과 함께 읽은 경험도 공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 등

발제자가 모임 자리에서 읽어주고

회원들은 활발하게 의견 나눠

도서관 부모 교육 프로그램도 인기

5주간 강의 들으며 어린이책 연구

20기까지 진행… 인천의 명물로

책은 마음의 풀무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꿈을 부풀리고, 상상을 늘리며, 지혜를 충전한다. 올해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 만난 라이프스타일 잡지 ‘모노클’의 편집장은 말했다. “당신이 읽는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말을 덧대지 않아도 모두가 이미 안다. 읽기는 정체의 표출이자 구성이다. 사람은 책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또 자신을 만들어간다.

도서관이나 서점에 있는 나를 떠올려보자. 마음에 책을 정하고 가지 않았다면, 한두 시간쯤은 훌쩍 간다. 결정 장애는 필연이다. 나랑 꼭 맞는 책을 찾기는 정말 어렵다. 책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리저리 뒤적이다 마음에 쏙 드는 구절이라도 마주치고 나서야 간신히 책을 손에 쥘 수 있다. 책을 고르는 것은 자기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책은 사물화한 자아다. 집이나 사무실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은 그 사람 내면의 목록이다.

아이에게 읽어주다 그림책에 빠진 엄마들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이 좋은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는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모임 장소인 인천 늘푸른어린이도서관에 둘러앉은 얘기보따리 회원들. 지역의 작은 도서관이 일군 책의 텃밭에서 자라난 독서공동체다. 장은수씨 제공
모임 장소인 인천 늘푸른어린이도서관에 둘러앉은 얘기보따리 회원들. 지역의 작은 도서관이 일군 책의 텃밭에서 자라난 독서공동체다. 장은수씨 제공

인천의 독서공동체 얘기보따리 회장 조성순씨가 말한다. 모임이 열리는 늘푸른어린이도서관은 아주 조그마했다. 먹자골목 안 깊숙한 곳에 있어서 처음엔 지나쳤다. 차를 돌려 근처 공영주차장에 댄 후 서둘러 돌아오니 왁자지껄한 식당 옆으로 2층 도서관으로 오르는 입구가 나 있다. 소음이 있으면 신호는 잡히지 않는다. 마음을 모으지 않으면 찾고자 하는 것이 눈앞으로 지나가도 놓치기 십상이다. 바로 보는 눈이 없으면 좋은 책이 있어도 깜깜하고 답답하다. 눈뜬장님이 되어서 무력하게 흘려보낼 뿐이다.

책은 아이들 마음에 세밀하면서도 거대한 지도를 그린다. 힘껏 자라는 시절에 아이들이 무슨 책을 읽었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윤곽선이 정해진다. 책은 타자의 삶을 연민하고 공감하는 심리적 주파수를 넓히고, 지식과 정보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지적 데이터베이스를 키운다. 아이가 읽는 책이 아이의 인간을 이루고 가족의 정신사를 구성하기에 부모는 아이와 함께 무슨 책을 읽을지를 정할 때마다 고되게 애쓴다.

얘기보따리는 협동의 힘으로 그 애씀을 함께 덜어 보려고 만들어졌다. 벌써 세 해째 엄마들이 모여서 한 주일에 한 번씩 금요일 오전마다 어린이책을 읽고 공부한 후 자연스레 좋은 책을 한 보따리씩 싸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고는 각자 아이와 함께 읽고, 다시 모여서 경험을 공유한다. 아이들 나이는 대개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이다. 엄마가 읽고, 모임에서 읽고, 아이랑 함께 읽으니, 책을 적어도 세 번은 읽는 셈이다. 채선미씨가 말한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데서 아이들한테 책을 많이 읽혀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저 역시 아이한테 책을 읽혀서 독서 습관을 붙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 학습에도 도움이 될까도 싶었죠. 그런데 모임에 나와서 어린이책을 읽으면서, 아이도 아이지만, 제가 그림책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책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도서관의 부모 독서교육에서 시작

얘기보따리는 늘푸른어린이도서관과 함께하는 독서공동체다. 모임은 발제자 중심으로 진행된다. 발제자가 작가를 선정해서 조사하고, 그 작가의 대표작을 모두 읽고 와서, 공부 내용을 회원들과 함께 나눈다. 그림책은 모임에 나와서 읽을 수 있어서 참 좋다. 발제자가 모임 자리에서 읽어주고 담긴 뜻을 새긴 후에 서로 활발하게 의견을 나눈다. 모임이 깊어지면서 요즈음에는 로알드 달,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과 같은 작가가 쓴 이야기책을 많이 읽는다. 모두가 미리 읽고 와서 감상을 나누고 의미를 따져 묻는 방식으로 모임이 진행된다.

인천을 대표하는 작은 도서관인 늘푸른어린이도서관은 어린이와 부모를 위한 평생학습 공간을 지향한다. 어린이는 주로 부모를 통해 책을 접하기에, 어린이 독서는 부모의 독서와 함께 이루어져야 좋은 길을 탈 수 있다. 한국에서 어린이책의 세계는 지난 스무 해 동안 급속히 진화해 왔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부모의 책 읽기가 이에 발맞추어 올라서야 아이들의 책 읽기도 따라서 수준을 높인다. 어린이도서관에서 부모의 독서교육에 힘을 쏟는 이유가 여기 있다.

얘기보따리가 자신들이 읽는 동화를 세계지도로 만들어 전시했다. 얘기보따리 제공
얘기보따리가 자신들이 읽는 동화를 세계지도로 만들어 전시했다. 얘기보따리 제공

얘기보따리는 늘푸른어린이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부모교육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하다. 벌써 20기까지 진행되었다. 정기적으로 회원을 모은 후 5주 동안 함께 강의를 들으며 어린이책을 배우고 이야기한다. 강좌를 듣고 나면 참여자들이 함께 모여서 적어도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린이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작은 도서관이 이룩한 책의 텃밭에 독서공동체의 씨앗을 뿌려서 부모와 자녀의 읽기를 같이 돋우는 셈이다. 이번에 만난 얘기보따리는 최근에 활동이 활발한 18기다. 손은규씨가 말한다. 함께 온 아이가 까르르 웃으면서 엄마의 이야기를 보챈다.

“우리 아이가 책에서 답을 찾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도 저절로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가 잠들기 전에 10~15분 정도 꾸준히 책을 함께 읽습니다.”

유년의 기억, 가족과 함께 읽기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한다.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준 이야기들은 갈수록 선명해진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칭얼대던 목소리까지 선명하다. 지문을 읽을 때는 고요하고, 대화를 읽을 때는 적절하던 어머니의 음성, 사이사이로 내뱉던 편안한 숨소리, 귀를 대면 저 깊은 속에서 고동치던 심장의 두근거림, 잠으로 끌려들면서도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면 가만히 떠지는 눈,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가장 깊은 원체험을 이룬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현대의 화법으로 다시 말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릎이야기’야말로 아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접붙이는 창조성의 가지다. 박세민씨가 말한다.

“저한테는 가족과 책을 읽었던 추억이 많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같은 책을 돌려보면서 수없이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 추억만으로도 살아가면서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제 아이도 같은 힘을 갖도록 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전집류를 많이 사주었는데, 어느 날 어린이 도서관에 와보니까 제가 몰랐던 좋은 책이 많더라고요. 전집류에서 탈출해 저 스스로 아이한테 책을 골라주고 싶어져서 모임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방문판매를 통해 주로 판매되는 전집류는 한국의 독서문화 또는 출판문화에서 양가적이다. 아이들 눈높이에 적당히 맞추어 만든 책을 50권, 100권씩 하나로 묶어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대량판매하는 이 북클럽 모델이 아직도 작동하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한국뿐이다. 서점이 뿌리를 내린 나라에서는 사실상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전집류는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다. 표준지식을 갖춘 표준인간을 단기간에, 대량으로 만들어내야 했던 시대에는 상당히 유효할 수 있다. 책의 보급과 읽기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40~50대는 모두 계몽사판 ‘세계명작동화전집’의 독자가 아니던가.

독서는 나에 대해 질문하는 것

그러나 정보화혁명은 표준의 시대를 창발의 시대로 바꾸고 있다. 미래는 표준지식을 이용하는 모든 일은 자동화되어 사라지거나 직업적 정체성이 약해질 것이다. 아이들이 창조적 사고에 익숙하지 못하면 미래의 다가올 물결을 헤쳐가기 어렵다. 솔직히 말하면, 전집은 창조의 결과물인 작품이 아니라 상품기획의 산물인 제품일 뿐이다. 아이들이 제품에 눈높이를 맞추도록 하는 부모는 아이의 미래에 무관심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동전집의 시대정신은 이미 막을 내렸다. 지금 돌아다니는 것은 습관이자 유령일 뿐이다. 작품에 대한 감수성이야말로 오늘날 부모가 아이에게 전해야 할 가장 커다란 선물이다. 그 일은 좋은 작품을 오랫동안 꾸준히 읽을 때에만 간신히 가능하며, 부모가 애써서 하나씩 아이한테 맞는 책을 골라 읽히는 수고를 동반한다. 얘기보따리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박소희 관장이 말을 보탠다. 박 관장은 어린이책 활동가로도 아주 유명하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 생각지 못했던 세계, 보지 못했던 세계와 꾸준히 마주치는 일입니다. 이런 낯선 만남을 통해서 사람은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나 편집자는 이런 이야기를 굳이 책으로 만들어서까지 독자를 왜 만나려 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학습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주지만, 독서는 아이들한테 자신에 대한 질문을 만들어낸다. ‘책 속의 아이들은 왜 나와 다르게 사는 걸까?’ ‘나한테 직접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왜 주인공과 똑같은 마음이 내 안에 생기는 걸까?’ ‘저 너머 세상에는 책에서와 같은 신비한 모험이 지금도 일어날까?’ 질문을 모아가면서, 아이들은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또래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내면이 부풀어 오르면서 아이들의 삶이 급속히 풍요로워진다. 공동체를 이루면 보너스도 있다. 이승연씨가 말한다.

“지난 겨울에 아이를 데리고 모두 대부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책도 낭송하고 기타 치면서 노래도 불렀죠. 아이들도 무척 좋아했어요. 모처럼 해방감을 만끽한 여행이었습니다.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잊지 못한 여행은 아이도 잊지 않는다. 읽기는 일상에 강세를 넣음으로써 삶을 망각으로부터 구원한다. 얘기보따리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이 아주 기억에 남는다. 모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한다면, 얘기보따리는 벌써 성장기에 접어든 셈이다. 아이들과 상관없이 오랫동안 같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장은수ㆍ출판평론가(순천향대 미디어콘텐츠학과 초빙교수)

◆얘기보따리가 추천하는 처음 읽기 좋은 동화책

독서공동체 얘기보따리가 추천하는 책 '몽실언니'
독서공동체 얘기보따리가 추천하는 책 '몽실언니'

권정생의 ‘몽실언니’를 권하고 싶다. 우리 모임에서 권정생의 유언장을 함께 읽은 적이 있었는데, 선하고 소박한 마음에 감격해 모두 눈물바다가 됐다. ‘몽실언니’는 어린 소녀가 가난한 삶 속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성장하는 이야기로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동화책에 입문하고자 할 때 먼저 읽었으면 좋겠다.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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