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둘째형과 추위 살짝 누그러진 겨울 햇살 받으며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대학에 있을 때 느꼈던 안타까움이 음대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는 게 안타까웠다. 하기야 스물넷 청년에게도 희망퇴직 요구하는 세상에 어쩌면 그 절망이 자연스러운지 모른다. 대학이 진리를 배우고 정의를 실천하는 전당은커녕 고작해야 안정적인 일자리 하나 얻는 게 필생의 업이 되었는데, 그마저도 시작도 채 제대로 하기 전에 그만 두란다. 명예퇴직이 명예롭지 않은 것처럼 그 청년에게 희망퇴직은 희망은커녕 절망일 뿐이다. 나를 포함해서, 청년들이 이 상황에 대해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어른들이 과연 그들의 아픔을 알까? 우리 기성세대는 이미 공감의 능력을 상실했다.
부모 세대가 누린 것을 자식 세대는 반의 반도 누리지 못하는 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발전은 고사하고 퇴행하고 추락하는데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외면이나 왜곡은 더 큰 죄악이다. 그건 보수가 아니다. 생각하는 보수라면 적어도 지금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틔우고 그 못자리를 마련해주며 그들이 활기차게 세상에 나아가 마음껏 멋지게 꿈을 실현하게 해야 한다.
이야기 중에 둘째형이 했던 말이 돌아오는 길 내내 떠나지 않았다. 지금 미국에서 총기 소유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총기 소유의 문제에서 보수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총기 사고가 나쁜 의도로 사용되고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고 공포에 떨게 하는 것이 문제인데, 미국인이 총기를 갖게 되는 본래 의미는 자신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것, 즉 사회나 국가가 지켜주지 않으면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데에 기인한다는 점이 기본적으로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적 가치라고 한다. 그런데 둘째형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건 그 다음의 분석이었다.
개인이 총기를 소유하는 건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의를 외면했을 때 총을 들고 국가에 대항해서 싸울 수도 있다는 사회적 결의가 전제되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게 진정한 보수의 가치란다. 평소 ‘생불’이니 ‘천사’니 하는 말을 듣는 형의 입에서 그런 ‘과격한’ 말이 나올지 몰랐다. 아마도 형이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그런 깊은 분석이 나온 것일 게다. 사회가 청년들을 절망하게 만들어놓고 대안이나 개선은커녕 오히려 그들을 빌미로 자기네 이익에만 탐닉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대학에 있는 형이 느끼는 절망과 공감이기에 그럴 것이다.
요즘 보수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진짜 보수는 올바르게 생각하고 정의롭게 행동한다. 개인의 총을 소유하는 이유, 즉 자신은 스스로 지킨다는 것과 부당하고 불의한 국가에 저항할 수 있다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지한다는 가치가 총과 관련된 미국 보수의 속살이라는 점을 톺아보면서 저절로 총과 민주주의가 연결된다. 총알(bullet)과 투표(ballot)의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1964년 맬컴 엑스가 대중연설에서 부르짖었던 연설의 제목이 바로 ‘투표냐 총알이냐’였던 것도 그런 때문이다.
총과 총알은 자신을 지키고 불의로부터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지만 투표는 최우선이며 최선의 수단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지금 민주주의와 사회정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를 먼저 묻고 따져야 한다. 그 가치들을 목숨 걸고서라도 지켜내는 게 보수의 존재 이유다. 그게 생각하는 보수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낼 총알로 현명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행동하는 보수다. 그런 보수의 올바른 모습은 지금 절망하는 청년들에 공감하고 그들을 보듬으며 미래의 희망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내년과 내후년에는 중요한 선거가 있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회복하고 미래의 희망을 마련하려면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행동해야 할 때다. 어두운 과거와 결별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진짜 보수가 나설 때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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