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용광로 '헬조선'...살아낼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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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용광로 '헬조선'...살아낼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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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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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는 2015년 연간 베스트셀러를 발표하면서 올해 출판계를 지배한 키워드로 ‘불안’을 꼽았다. 전국민을 전염병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 청년실업과 정리해고, 비정규직 확산에 따른 고용 불안에다 외국에서 잇따라 터진 테러까지 불안이 몸과 마음과 일상을 흔들었다. 고단하고 고단했다.

시대의 거울이자 초상으로서 문학은 ‘헬조선’의 절망을 비췄다. 올해 한국 소설 최고의 화제작인 장강명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헬조선에 대한 젊은층의 염증이 극에 달할 무렵 나왔다. 11년간 기자로 일하다가 돌연 소설가로 전직, 3년 간 4개의 문학상 공모에 잇따라 당선된 작가는 이 책의 흥행 요인으로 ‘제목빨’을 꼽았다. 20대 여성이 한국을 견디지 못하고 사표를 던진 뒤 호주로 떠나는 내용을 담은 이 작품은 2만 부 넘게 팔렸다.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에 맞서 책은 심리적 무장을 권했다. 1년 내내 판매량 1위를 지키며 최장기 베스트셀러 기록을 갈아치운 ‘미움 받을 용기’가 그 연장선에 있다. 한국에는 낯선 이름이던 아들러의 심리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이 책은 자유도 행복도 용기의 문제일 뿐 환경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며 미움 받을 용기, 평범해질 용기, 자유로워질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며 미움 받지 않으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흔한 충고와는 반대로 미움 받아도 괜찮으니 용기를 내어 행복해지라는 메시지가 독자를 사로잡았다. 아들러 돌풍을 타고 용기를 내세운 책이 줄을 이었다. ‘버텨내는 용기’ ‘늙어갈 용기’ ‘상처받을 용기’ ‘나답게 살 용기’ ‘벼랑 끝에 설 용기’ ‘인생에 지지 않을 용기’ ‘나와 마주서는 용기’….

반디앤루니스 종로타워점 앞에 설치된 베스트셀러의 벽. 18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전시된 베스트셀러 책들은 시대의 초상이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최장기 베스트셀러 1위를 갈아치운 2015년 화제의 책 ‘미움 받을 용기’.

용기를 내야만 겨우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해법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겠지만, 이 책들은 사회적 행동보다 개인적 결단을 요청한다. 한계가 뚜렷한데도 유례없이 강렬한 용기 열풍에 대해 출판평론가 장은수씨는 “한없이 연약해진 자아를 단단한 호두껍데기로 감싸보려는 안타까운 몸짓”으로 해석했다.

불안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몸짓은 단단해지기 연습으로 나타났다. 인터넷서점 예스24는 2015년을 “나의 안팎을 단련하는 책이 인기를 끈 한 해”로 분석했다. 교보문고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사색하는 책들이 사랑 받은 해”였다며 “쉼표를 찍으려는 독자들이 ‘혼자 놀기’에 빠졌다”고 풀이했다. 색칠하기 책과 필사책이 인기를 끈 것은 마음을 비우고 스트레스를 풀어 불안에 지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몸짓으로 보인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독자들은 ‘넘사벽’ 같은 묵직한 교양 대신 쉽고 재미있는 교양을 찾았다. 베스트셀러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비롯해 실용성을 가미한 인문서가 많이 팔리면서 교양 독서의 문턱을 낮췄다. 유시민 신영복 같은 믿고 보는 저자의 진지하면서도 대중성을 잃지 않은 신간도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교보문고와 예스24 등의 도서 판매 점유율에서 인문서의 비중이 일제히 올라갔다.

‘넓고 얕은’ 지식에 반감을 표시하는 반응도 나왔지만, 입문 성격의 이런 책들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독자들이 수동적으로 책을 읽는 데에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책을 내 것으로 체험하는 행위자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면 더 알려고 하는 법. 최근 들어 함께 읽고 함께 공부하는 활동이 부쩍 늘고 있다. 저자 강연을 듣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읽고 쓰고 배우며 지적 영토를 개척해 가는 모험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2012년 출간된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가 2015년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TV의 힘이 컸지만 그 전부터 박준의 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시 중 하나였다. 9월 tvN ‘비밀독서단’에 시집이 소개된 후 판매 부수는 기존 1만5,000부에서 두 달 만에 4만5,000부로 뛰었다. 미디어셀러의 힘을 증명함과 동시에 시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유통성에서 소설과 명운이 갈리기 시작했음을 확인시켰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로 문학시장이 잔뜩 위축됐던 올해, 문학의 화제작으로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와 프레드릭 베크만의 ‘오베라는 남자’가 꼽힌다. 유일하게 등판한 스타 작가인 김훈의 산문집이 출간 전부터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며 뒷말을 남긴 점,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국내 문학작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가운데 해외 무명 작가의 첫 소설 ‘오베라는 남자’가 20만 부나 팔린 점은 고스란히 한국문학의 위기를 상징한다.

‘오베라는 남자’의 인기는 세대 갈등이 이념 갈등과 엮여 극에 달한 현실을 반증한다. 현실에선 보기 드문, 젊은 층이 좋아할만한 ‘어른’의 캐릭터가 인기를 끌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스웨덴 블로거 출신 베크만은 겉은 까칠하지만 속은 따뜻한, 요즘 말로 전형적인 ‘츤데레’ 타입의 오베를 탄생시켰다. 59세의 오베가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 외엔 특별한 사건이나 교훈도 없지만 오직 인물의 매력만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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