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강명관 지음
휴머니스트 발행ㆍ348쪽ㆍ1만8,000원
어떤 발명품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인쇄술은 종교혁명에, 증기기관차는 산업혁명에 기여했다. 망원경은 천동설의 시대를 끝내고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망원경, 시계 등 서양의 근대를 의미하는 대표적 발명품들이 극히 폐쇄적이었던 조선 한복판에 떨어진다면?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은 이 같은 의미심장한 질문에서 시작해 청나라를 통해 서양 근대 문명을 접한 조선의 풍경을 복원하는 책이다. 저자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각종 사료 분석과 해석으로 고전과 역사의 이면을 풀이해온 한문학자다. 그는 조선 후기에 들어온 안경, 망원경, 유리거울, 자명종, 양금 등 다섯 가지 서양 물건의 수용사를 탐구하기 위해 관련 문헌과, 그 토대가 된 중국 문헌 등을 면밀히 분석하고 풀어냈다.
이들은 모두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꽤나 낯설고 신기한 물건들이었다. 임병양란 이후부터 1876년 개항 때까지 거의 2세기 반에 걸쳐 “국제적 감각을 잃고 고립된” 조선은 사실상 중국을 통해서만 서양의 흔적을 인식할 수 있었고, “딴판으로 변해가는” 한반도 바깥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다섯 물건의 수용상은 각기 달랐다. 안경과 유리거울은 널리 수용되며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 안경에 대한 조선 최초의 기록은 이호민이 1606년에 쓴 ‘안경명’으로 임진왜란을 전후로 조선에 알려지고,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식인들에게 애체(구름이 잔뜩 낀 모양)라는 별명을 얻으며 다양한 문헌에 기록됐다. 유리거울 역시 러시아가 북경에 진출한 뒤 조선에 유입돼 빠르게 청동거울을 대체했다.
하지만 서양의 근대를 집약한 자명종과 망원경은 오히려 조선에서 일부 극소수의 호기심 많은 양반 사족들의 전유물에 그쳤다. 자명종만 해도 19세기 전역에 수백 개 남짓 유입됐을 뿐이고, 더 수용 정도가 낮았던 망원경은 해를 관측, 곧 “왕의 뜻을 들여다 보는 물건”이라 하여 영조가 부숴버리기도 했다.
저자는 농업 국가였던 조선에서 무엇보다 “분 단위, 시 단위로 나눌 만한 노동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근본 원인으로 봤다. 또 망원경을 활용해 본격적인 천체 관측을 하거나 천체학을 이해할 만큼의 관심도 부재했다고 봤다.
저자는 무엇보다 여러 발명품과 관련해 “원리에 대해 무관심”했던 당대 풍토에 주목했다. 그 과학적 원리와 지식에 대한 탐구 기록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 교수는 “다섯 물건은 서구의 매우 복잡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출현한 것으로 조선이 이를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만큼 이 무관심을 “조선의 실패”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선을 긋는다.
다만 이런 한계의 이면에는 폐쇄적인 지식 사회의 풍토가 있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양반 사족 체제의 학문인 성리학에 몰두하는 풍토에서 기술이나 기술학에 흥미를 보이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었던 데다, 당시 정치권력과 문물, 지식을 차지했던 경화세족(京華世族) 내에서조차 서양의 자연학에 대한 이해가 전면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필사본으로 극히 소수에게 유통됐을 뿐이고, 그것이 사족 사회 전체에 유포돼 자유로운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폐쇄적 풍토가 망원경 등 흥미로운 촉매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지적 흥분을 유발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의미심장하다. “격실 속의 지식은 15세기 국가 건설기에 사족 지식인들이 보였던 적극성과 창조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것이 서양의 기기와 그 배후에 있는 이론에 대한 탐구를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 (…) 실재하는 서양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은 쇠락하는 사족 체제였다. 이 점을 다른 말로 꾸미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 할 것이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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