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전성기를 맞은 지금 일본에선 느닷없이 ‘다나카 열풍’이 불고 있다. 사후 20년이 지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ㆍ1918~1993년) 전 총리 관련 책이 상반기에만 14권이 나와 서점진열대를 뒤덮고 있다. TV나 잡지에서 그의 호쾌함과 인간미를 추억하는 장면이 봇물 터진 듯 쏟아진다. ‘아베 독주시대’에 왜 일본인들은 그를 끄집어냈을까. 술과 돈 등 부패했으나, 탁월한 정치력까지 수많은 전설과 일화를 남긴 거인(巨人). 지금과는 뭔가 다른 리더십의 원형이 그리워서일까.
최근 아사히(朝日)신문은 흥미로운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자민당원 1,254명에게 물은 결과 역대최고 총리로 아베가 뽑혔고 다나카는 3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당원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높은 계층에서 최고의 지도자로 다나카를 지목하는 비율이 높았다. 아베의 자민당과 과거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두 리더의 통치스타일은 여러 면에서 대립한다. 집단자위권법 강행, 평화헌법 개정 추진처럼 아베는 이념적 문제에 집착하는 반면, ‘일본열도개조론’을 내건 다나카 시대에는 이데올로기가 발붙이지 못했다. 아베의 자민당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고, 총리관저가 독주하는 당정관계가 특징이다. 반면 다나카 시대는 당내파벌간 이익유도 정치로 설명된다. 특히 다나카를 추종하는 50, 60대 당원층이 현 아베 체제에 비판적이다. 이들은 “헌법개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경기나 고용, 사회보장 등 생활직결형 현안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지식계층의 한 일본인 지인에게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인물이 누구인지 물은 적이 있다. “전후 인물만 뽑는다면 단연 다나카”라고 답했다. “일중관계, 일한관계가 나쁜 지금 다나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다”고도 했다.
‘서민재상’으로 불린 다나카는 언행이 거칠었지만 실행력이 탁월했다. 대장성 장관으로 임명되자 엘리트 관료집단에선 노골적 불신이 가득했다. 그런데 취임연설이 시작된 지 몇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의 불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천하가 다 아는 수재들이고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나왔습니다. 대장성 일은 깜깜합니다. 일은 여러분이 마음껏 하고, 나는 책임만 지겠습니다.”
의리를 중시하는 다나카는 헬리콥터를 타고 오지의 상가집을 찾아 다녔고, 중일 국교회복을 실현할 당시엔 중국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물론 그는 금권정치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 시대 선거에선 산토리 올드위스키 빈 상자에 1,000만엔이 담겨 전달되기도 했고, 다케시타나 가네마루가 답습한 그의 정치수법은 돈에 의지해 의원 머릿수를 계산하는 데 철저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부활하는 현상은 현 집권세력이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여당 내에 활력이나 치열한 정책논쟁이 없다며 차라리 파벌정치 시대를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한국처럼 일본도 배짱과 담력이 넘치고, 세대를 뛰어넘는 거목의 정치력이 아쉬운 시대인가보다.
요즘 아베 총리는 내년 참의원 선거에 앞서 중의원을 해산한 뒤 동시선거를 밀어붙일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있다. 국민투표 성격을 부여해 1년 전 시도한 성공전략과 동일하다.
그러나 전성기에는 시한이 있다. 이마저도 다나카를 교훈 삼을 필요가 있다. 총리취임 후 중국을 전격 방문했던 다나카의 지지율 60%는 당시로선 기록이었다. 이를 과신한 다나카는 여세를 몰아 의회해산에 나섰지만 패배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이 의석을 늘렸고 지방선거도 혁신세력이 승리하면서 정권은 정점에서 급격히 기울어갔다. 다나카의 마지막 제자인 아베 내각의 이시바 지방장관이 지금 “자민당에 필요한 건 국민에 대한 예의”라고 말하고 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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