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 인권운동가 이태영(李兌榮, 1914~1998)이 1998년 오늘 별세했다. 그는 법과 인습에 맞서 성 평등 사회를 앞당긴, 한국의 선구적 여성ㆍ인권 운동가였다.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정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됐고, 훗날 미군정과 2공화국 각료, 국회의원(8선)을 지낸 독립운동가 정일형(1904~1982)과 결혼했다. 이화여전과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52년 제2회 사법시험에 응시해 첫 여성 합격자가 됐다. 당시 대법원장 김병로는 그의 판사 임명을 제청했지만 봉건적 여성관을 지닌 이승만 대통령이 거부해 변호사가 됐고,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 가족법 개정 운동을 주도했다.
여성변호사라는 점 때문에 가정에서 억눌린 여성들이 그를 앞서 찾곤 했고, 이태영은 56년 ‘여성법률상담소(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전신)’를 열었다. 별도의 가정법원이 필요하다며 62년 청원운동을 시작, 이듬해 가정법원이 설립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66년 개소한 지 10년 된 ‘상담소’를 사단법인으로 바꾸며 ‘가정법률상담소’로 이름을 고쳤고, 또 10년 뒤인 76년 현재 명칭의 공익법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는 한국의 드문 여성ㆍ인권 운동가이기도 했다.
정일형(1904~1982)은 독립운동가였다. 미군정청 인사ㆍ물자 행정처장과 과도정부 각료를 지냈고, 48년 정부수립 후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요청하기 위한 정부 대표단으로, 대통령 부특사로 활약했다. 이승만의 54년 ‘사사오입 개헌’ 이후 그에 반발한 ‘호헌동지회’에 가담했고, 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4.19혁명 이후 외무부장관, 5.16군사쿠데타 뒤로는 야당 의원으로서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삼선개헌 반대 등에 앞장섰다. 유신에 반대해 76년 3월 명동성당에서 감행한 ‘3ㆍ1민주구국선언’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구속돼 의원직과 공민권을 상실했다. 그의 장남인 정대철 현 상임고문이 아버지의 지역구(서울 중구)를 물려받아 의원이 된 것은 78년 제10대 총선부터였다.
이태영은 여성운동과 더불어 민주화 운동을 병행했다. 71년 신민당에 입당했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구속된 이들의 무료 변론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 역시 ‘3ㆍ1선언’에 참여했다가 77년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했다가 80년 복권됐고, 그 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서 DJ 곁에 서기도 했다.
그가 숨진 지 6개월 뒤 여성단체연합은 ‘호주제폐지운동본부’를 발족했다. 그 해 말 유엔인권위원회가 폐지 권고를 결의했고, 2000년 9월 ‘호주제폐지 시민연대’가 발족했다.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2005년 3월. 이태영이 폐지운동을 시작한 지 53년, 알츠하이머와 노환 합병증으로 그가 세상을 뜬 지 7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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