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눈이 부셨다. 충무로를 빛냈던 별들이 촘촘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영화의 역사가 가득했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자하문로 한 카페에 노장들이 모였다. 연말 여느 송년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자리였으나 참석자 면면을 살피면 눈이 번쩍 뜨일만했다. ‘별들의 고향’(1974)으로 데뷔해 1970~80년대를 풍미한 이장호(70) 감독이 한가운데 앉아있었다. ‘남부군’(1991)과 ‘부러진 화살’(2011)의 정지영(69) 감독도 눈에 띄었다. 4년마다 영화를 만든다고 하여 ‘올림픽 감독’이라는 별명이 붙은 ‘신기전’(2008)의 김유진(65) 감독도 함께 했다. ‘개 같은 날의 오후’(1995)로 유명한 이민용(57) 감독도 자리를 했고,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의 장길수(60) 감독도 참석했다. ‘결혼이야기’(1992) 등을 연출했고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의석(58) 감독과 ‘맨발의 꿈’(2010) 등의 김태균(56) 감독도 볼 수 있었다. ‘더 게임’(2008)의 윤인호 감독이 이날 모임의 막내였다. 가장 연소자라고 하나 윤 감독은 52세다.
이날 모임은 ‘오영감’의 이름으로 이뤄졌다. ‘오영감’은 ‘오늘의 영화감독’을 줄인 말로 10년 전 강우석 감독이 주창해 만들어졌다. 여전히 혈기 뜨거운 50대 안팎의 감독들이 메가폰을 쥘 기회가 적어지자 영화에 대한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얼굴 보며 힘을 내자는 취지였다. 감독들이 조로하는 충무로의 풍토를 바꿔보자는 의지가 담긴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오영감’의 덕을 본 것일까. 정지영 감독은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1985’(2012)로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두루 받으며 60대 후반에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장호 감독은 지난해 ‘시선’으로 메가폰을 다시 쥐었다.
이날 모임에서 가장 눈에 띈 인물은 장선우(63) 감독이었다. 그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으로 재앙에 가까운 흥행 참패를 겪은 뒤 잊힌 감독이 됐다. ‘성공시대’(1988)와 ‘꽃잎’(1996), ‘나쁜 영화’(1997), ‘거짓말’(1999) 등 만드는 영화마다 화제를 뿌리며 관객몰이를 했던 장 감독은 ‘귀여워’(2004)에 조연으로 출연한 뒤 충무로를 떠났다. 제주도에 낙향해 카페를 연 그는 10년 동안 칩거하며 영화계와 거리를 뒀다. 이날 그의 등장은 활동 재개의 신호로 여겨질 만하다.
지난 10월 개봉해 488만 관객을 맞았던 ‘마션’의 리들리 스코트 감독은 1937년생이다. 78세 노장이나 그는 안정적이고 신선한 연출력을 뽐내며 거의 매년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2017년 그의 차기작 ‘에일리언: 커버런트’가 개봉할 때면 팔순에 이른다. 언뜻 평범해 보이나 참석자들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송년 모임을 보며 한국의 리들리 스코트를 기대했다. 고령화 사회에서 60, 70대도 청춘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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