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실화다. 얼마 전 이른 아침, 서울 시내버스 안, 기사와 세 명의 승객이 있었다. 50대 신사와 회사원 차림의 젊은이, 중학교 1~2학년쯤 돼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한 정류장에서 80세 전후로 보이는 노인이 탔다. 그는 양손에 묵직한 비닐봉지를 끌고 힘겹게 버스에 올랐다. 노인은 “요금이 없어서 미안하다. 조금만 태워달라”며 기사 뒷자리에 걸터앉았다. 기사는 “요금도 없이 버스를 타시면 안 됩니다”면서 “다음 정류에서 내리세요”라고 말했다. 일순 버스엔 긴장감이 돌았다.
▦ 노인은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거듭 “미안하다”고 했고, 기사는 “그러시면 안 된다, 내리시라”고 했다. 여기까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중간쯤 앉아있던 소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기사 아저씨, 할아버지 내리라고 하지 마세요! 차비가 없다고 하시잖아요.” 더 놀란 것은 소녀의 다음 행동이었다. 소녀는 버스요금 박스에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집어넣었다. 뜨악한 표정을 짓는 기사에게 “잔돈은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타시면 요금으로 계산하세요”라고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 진정 당혹스러운 쪽은 신사였다. 자신의 지갑에 있는 몇 장의 지폐가 떠올랐다. 슬며시 한 장을 빼냈다. 다행히 소녀는 내리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신사는 목적지에서 버스 문이 열리자 소녀의 외투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을 슬쩍 집어넣고는 죄인처럼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신사의 만 원을 소녀가 어찌했는지, 소녀의 만 원을 기사가 어찌했는지 알지 못한다. 신사는 여기까지의 얘기를 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고백하면서 소녀에 대한 어른의 죄책감을 씻고 싶다고 했다.
▦ 한 아주머니가 빵을 사러 동네 제과점에 들렀다. 한 노인이 케이크를 주문하면서 집까지 배달해줄 수 없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파킨슨병 환자였다. 부인이 깜짝 놀라게 생일파티를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종업원은 규정상 배달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일을 팽개치고 노인을 부축하여 함께 케이크를 집까지 들어다 주었다. 그 아주머니는 ‘버스 안 소녀와 노인’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신사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그 소녀가 갖고 있는 DNA 같은 게 아닐까요?”
/정병진 논설고문 bj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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