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마구간과 같다 하여도, 꾸미고 싶어지는 때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믿지 않아도, 장식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비단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모든 존재의 세계 입성을 환영하고, 서로의 온기로 한 해를 온전히 살아냈음을 경하하고 싶은 마음. 크리스마스가 열대의 나라도 들썩이게 만드는 이유다.
거실 한 쪽에 커다란 형형색색의 트리를 설치해 놓고 그 아래 선물을 쌓아두는 영화 속 한 장면은 누구에게나 오래 품어온 크리스마스의 로망. 하지만 실현이 불가능한 것은 아직 내가 집을 마련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총천연색 방울들을 장식물로 달고 있는 대형 트리는 더 이상 트렌드가 아니다. ‘작은 집 시대’의 ‘작은 사치’. 올해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의 키워드다. ‘소박하지만 고급스럽게, 작지만 따스하게’가 올 크리스마스를 빛내줄 마법의 주문이다.
작은 집 시대… 고급스런 소형 트리가 대세
빨강과 초록은 크리스마스의 시그니처 컬러다. 두 색이 나란히 만나기만 하면 그 자체로 크리스마스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노랑과 파랑과 보라, 금과 은과 동도 이제는 잊어야 한다. 전형적인 총천연색 대형 트리는 너무 식상하지 않은가. 간결한 톤에 따스한 느낌이 올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예전에는 저가의 풀세트 대형 트리가 많이 판매됐다면 요즘은 중소형이 대세죠. 크기와 구성이 작아지고 단출해진 반면 가격은 높은 제품들이 반응이 좋아요.” 행복디자인(designhappy.co.kr)의 박미경 대표는 “인테리어 전반에 대한 눈높이가 높아짐에 따라 작은 것에라도 아낌없이 투자하는 가치소비가 크리스마스 데코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테리어의 소품화 경향은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테이블이나 선반, 거실장 위에 올려둘 수 있는 화분 타입의 소형 트리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 원룸에도 설치할 수 있는 벽걸이용 트리(월트리) 같은 것이 대거 출시됐다. 각기 다른 길이의 나뭇가지를 이용해 트리 모양의 삼각형을 만든 후 조명 장식을 하거나 아예 줄 조명을 삼각형 모양의 지그재그로 벽에 붙여 전구알만으로 트리 느낌을 내는 식이다.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트리는 너무 식상하니까 뭔가 새로운 스타일을 보자 해서 자작나무를 엮어봤어요. 벽에 거는 월트리로 좋겠다 싶었죠. 집에서 만들 때는 꼭 자작나무가 아니라 산에서 쉽게 주울 수 있는 나뭇가지도 괜찮아요.” 플로리스트인 김윤희 아뜰리에티움 실장은 “북유럽 스타일은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며 “북유럽식 내추럴 트렌드를 보여주면서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도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월트리가 특히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월트리 대신 벽걸이용 화환 ‘리스’를 활용할 수도 있다. 이때 화환에 많은 장식물을 달기보다는 내추럴 무드를 살릴 수 있도록 화환 자체가 잎새들로 풍성한 것이 좋다. 월트리나 화환의 또 다른 좋은 점으로는 먼지가 덜 쌓인다는 것. 트리를 창고에 집어넣는 신년이면 잎사귀 위에 잔뜩 껴있는 먼지에 소스라치기 십상이다. 실제 크리스마스 트리의 먼지와 곰팡이가 알레르기성 비염과 천식을 유발한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며 ‘크리스마스 트리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화이트와 골드 톤으로 색조를 제한하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명절 특유의 흥성스런 분위기가 간절할 수 있다. 이때는 포인트 컬러를 적절히 사용해 경쾌한 느낌을 낸다. 포인트 하면 역시 레드. 아이가 직접 만든 털실볼이나 종이접기 같은 것을 오너먼트로 이용하거나 아끼는 장난감을 걸어두는 것도 천진한 동심을 스타일로 변모시키는 좋은 아이디어다.
올해 가장 화제를 모은 트리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작가인 영국의 데미언 허스트가 런던 콘노트호텔 바깥에 설치해놓은 작품. 노르웨이 가문비나무로 만든 이 트리는 300여 가지의 장식품을 매달고 있는데, 올해의 대세 톤인 화이트톤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오너먼트들이 거대한 알약으로 만든 눈사람과 약병, 연핑크 소시지 같은 식약품들이다. 거기에 은색 가위와 의료도구들까지 매달아놨다. 키치의 기운이 물씬하면서도 매우 트렌디하다. 색조의 톤만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오너먼트로 사용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데미언 허스트의 메시지다.
북유럽처럼… 따뜻한 패브릭 트리
크리스마스 장식은 실내에 외부를 들여오는 작업이다.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산타를 집 안에서 만나려는 ‘꾀’가 바로 트리를 비롯한 크리스마스 장식이다. 여기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욕망 기제는 따뜻하고 싶다는 것. 몸과 마음 모두 해당되는 얘기다.
올해는 이 욕망을 스칸디나비아 스타일로 풀어낸 패브릭 소재의 크리스마스 트리가 많다. 더 이상 전나무만이 트리의 소재가 아니다. 울이나 펠트 같은 패브릭 소재로 나무를 대신하고, 오너먼트도 털실볼이나 양말, 장갑 같은 섬유 제품이 많다. 더욱이 북유럽 인테리어의 영향으로 오늘날 가장 세련된 인테리어는 집에서 직접 만든 듯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연출이다.
나무처럼 대형트리를 제작하기 힘든 패브릭 트리는 이케아 세대들이 이끈 인테리어의 단품화ㆍ소형화 추세와 맞물리며 유행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 소(小)장식품을 이용해 소박하게 분위기만 연출하는 인테리어 트렌드에 패브릭은 매우 맞춤한 소재다. ‘트리 형태의 작은 장식품’이라고 일컫는 게 정확한 높이 20㎝ 남짓의 탁상용 트리가 많아진 이유다.
펠트는 동물털의 축융성을 이용해 습기와 열, 압력 등을 가해 만든 천으로 고급스러우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자아낸다.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 리본 장식 등으로 애용돼 왔지만, 이제는 아예 그 자체로 트리가 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펠트 천을 고리 만들기 방식으로 둥글게 접어 나무 모양으로 고정한 후 장식품을 달면 된다.
털실은 실 가닥을 따라 일어나는 섬유 잔털만으로도 따뜻해지는 느낌을 주는 겨울 대표 소재라 빠질 수 없다. 울트리를 만드는 방식은 다양하다. 나무막대에 파스텔톤이나 모노톤의 털실을 촘촘하게 둘러 감거나 목화솜처럼 포근한 느낌의 흰색 울을 넓적하게 잘라 리본 형식으로 나무를 구성한 후 금색이나 레드로 포인트 컬러를 정해 오너먼트를 달아준다.
오너먼트로 패브릭을 사용하는 것도 여전히 세계적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노르딕 미학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펠트로 간단하게 리본을 묶어 매달면 쉬우면서도 유쾌한 장식 효과를 낼 수 있고, 벨벳이나 광택이 나는 새틴 소재를 나뭇가지 끝에 두껍게 묶어두는 것도 풍부한 부피감을 살리면서 장식효과를 낼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다. 나무로 만든 눈꽃이나 별 모양 레이스, 패브릭 리본 등은 대표적인 노르딕 스타일 장식품들. 여기에 방금 눈이 내린 것처럼 뽀얀 눈가루를 뿌려주면 노르딕 효과는 극대화된다. 단, 번쩍번쩍한 장식 방울들은 금물!
트리 장식이 끝났다고 해서 완벽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는 않는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는 양초와 테이블웨어가 필수다. 양초는 흔들리는 촛불뿐 아니라 향긋한 내음까지 퍼뜨리며 따스하고 안락한 무드를 자아낸다. 양초문화가 일반적이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갖춰놓은 집이 별로 없지만, 양초를 담아두는 캔들 홀더는 몇 개 흩뿌려 놓는 것만으로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한다. 촛불이 비치도록 구멍을 낸 홀더에는 초를 얇게 썰어놓은 형태의 티라이트(Tealight)를 담아두고, 포인트로는 기둥형 아로마 캔들에 솔방울이나 각종 열매를 곁들인다. 자기 소재의 홀더는 따뜻한 느낌을 주고 메탈은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를 내서 좋다. 작지만 따스하고 아름다운 트리, 코끝으로 스치는 다정하고도 달콤한 향기.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비로소 나눌 만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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