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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시위다 과잉진압이다 논란이 뜨겁다. 도심이 언제 또 폭력으로 얼룩질지 모를 일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전환기마다 대규모 민중봉기가 있었다. 진압에 나선 정권과 이에 맞선 시위대는 어김없이 치열한 폭력을 주고 받았다. 목숨을 건 격렬한 대결 속에서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치켜들었던 도구들을 하나하나 꺼내 봤다. 그 시절 공권력은 맨 주먹의 시위대를 억압했고 성난 시위대는 돌멩이와 각목으로 맞섰다. 진압작전이 한층 과격해지자 시위대는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앞세웠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흔한 교훈, 희미한 기억을 더듬는 동안 선명하게 눈에 띈 한 가지다.
돌멩이 vs 방패(그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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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부정선거 항의 위해 거리에서 투석전
전경, 방패로 몸 보호… 끝부분 갈아 공격도
손쉽게 주어 던지는 돌멩이는 가장 원초적인 시위 도구다. 1960년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해 맨손으로 거리에 나온 학생과 시민들은 경찰의 무차별 발포에 맞서 투석전을 벌였다. 1970~80년대 독재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은 보도블록을 깨서 던졌다. 1985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보도블록이 남아나지 않자 서울시는 아예 보도를 아스팔트 재질로 포장하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값비싼 투석전은 1996년 한총련 사태 때 벌어졌다. 당시 연세대 과학관과 종합관을 점거하고 있던 학생들은 경찰의 진압작전이 펼쳐지자 과학관 옥상 등에서 돌을 던지며 저항했는데 이 중 대부분이 지질학과의 희귀 암석 1만여 점이었다.
날아오는 돌멩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은 방석모와 방패, 그물망까지 동원했다. 특히 높이 3m, 넓이 10m짜리 그물망을 펼친 모습이 눈길을 끌었는데 일부 전경들은 날아온 돌멩이를 주워 되던지기도 했다. 70~90년대에 걸쳐 널리 사용된 FRP방패는 재질이 약해서 한 부분이 깨지면 계속해서 찢겨나갔다. 이를 간파한 시위대가 한쪽을 밟아 납작하게 만든 쇠파이프로 방패를 찍고 전경들은 일명 ‘방패갈기’로 끝 부분을 날카롭게 만들어 시위대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 후 폴리카보네이트와 알루미늄 방패를 거쳐 지금의 평화방패까지 이어졌다.
쇠파이프(각목) vs 진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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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대학가 사수대, 공권력 맞서 사용
60년 4ㆍ19땐 50cm, 80년 5ㆍ18땐 120cm
정부수립 초기 정치깡패들이 테러에 사용하던 각목과 쇠파이프가 80년대 들어 대학가 시위에 단골로 등장했다. 시위대 최전방의‘사수대’는 쇠파이프를 들고 진압작전에 맞섰다. 자칫 살상무기가 될 수 있는 만큼 경찰은 쇠파이프를 든 시위대 검거에 힘썼는데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투입된 ‘백골단’이 쇠파이프를 함께 휘두르는 웃지 못할 광경도 벌어졌다. 2000년대 들면서 상경시위에 나선 농민들은 쇠파이프 대신 물푸레나무를 꺼내 들었다. 길이 2~3m 정도로 쇠파이프보다 긴 데다 끝이 휘어지는 성질 때문에 경찰이 진압에 애를 먹었다.
4.19 혁명 당시 경찰 진압봉의 길이는 약 50cm 였다. 1989년 시위대의 거센 저항에 맞서기 위해 20cm를 늘렸고 90년대 들어 105cm, 1996년 한총련 사태 이후 120cm 길이의 진압봉이 등장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가 휘두른 진압봉이 120cm였다. 진압봉의 진화 과정에서 경찰의 반칙도 끊이지 않았다. 90년대 플라스틱 진압봉의 빈 공간에 쇠파이프를 심거나 길고 짧은 두 진압봉을 끈으로 연결한 쌍절봉 형태의 진압봉을 휘둘러 비난을 받았다. 경찰은 이제 불필요한 자극을 피하기 위해 시위진압 시 진압봉을 소지하지 않는 대신 캡사이신액을 분사해 시위대를 제압하고 있다.
화염병 vs 최루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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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속에 인화물질 넣어… 파괴력 커
시위대 해산 위해 자주 쓰여… 98년 퇴출
유리병 속에 휘발유 같은 인화물질을 넣은 화염병은 전쟁에서 대전차 무기로 사용될 만큼 파괴력이 크다. 주로 방화 등 기습시위에 쓰이던 것이 대학가 시위에 등장한 건 80년대.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경찰의 진압작전 또한 과격해지자 시위대는 돌멩이보다 더 파괴적인 공격 수단이 필요했다. 대학 축제 기간엔 화염병 던지기 게임이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시위도구였던 화염병은 한총련사태로 학생운동이 쇠퇴하기 전까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노동자 및 철거민 시위에 간헐적으로 등장했고 2009년 용산참사의 발화원인을 화염병으로 판단한 법원의 판결이 논란을 부르기도 했다.
시위대 해산에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최루탄은 역설적으로 민주화 투쟁사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 김주열, 1987년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되면서 각각 4.19혁명과 6.10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휴대용 발사장치로 쏘는 최루탄과 손으로 투척하는 사과탄, 장갑차량에서 발사하는 다연발탄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다연발탄 발사차량을 칭하는 페퍼포그(Pepper Fogger)는 원래는 최루가스 분사 장치로 1969년 경북대에서 벌어진 3선개헌 반대시위 때 처음 등장했다. 최루탄은 1998년 국민의 정부의 무최루탄 원칙에 의해 공식적으로 퇴출됐다.
점거농성 vs 백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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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화원 등 상징적 시설 점거로 관심 끌어
경찰 사복 체포조… 시위대엔 공포의 대상
1980~90년대 경찰의 강경진압과 연행, 원천봉쇄 때문에 시위나 집회를 통한 의사표현이 여의치 않자 학생들은 점거 농성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정권이나 특정 세력의 상징적인 시설을 점거해 여론의 주목을 끌어 정치적 주장을 표현했다. 대학 본부를 비롯해 미문화원이나 민정당정치연수원, 국세청 등 관공서가 점거의 주 타깃이었다. 90년대 말 IMF 이후 시위의 주체가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나 농민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대형마트, 공장 같은 개별 사업장이나 재개발 지역, 고공 크레인 등에서 점거농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의 사복 체포조를 일컫는 ‘백골단’은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에게는 반민주 철권통치의 상징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무술 공인 3단 이상이나 특수부대 출신으로 두툼한 진압복 대신 청자켓을 입었고 방석모 대신 날렵한 오토바이 헬멧을, 군화 대신 운동화, 방패 대신 쇠파이프를 들었다. 기동성을 앞세워 시위대 깊숙이 밀고 들어가 시위 주동자 및 지도부를 체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주요 시설에 대한 점거농성을 진압하는 데도 선봉에 섰는데 체포 과정에서 폭언과 폭력을 행사해 시민들로부터도 지탄을 받았다. 백골단은 한총련사태 이후 점차 사라졌다.
촛불행렬 vs 차벽 및 물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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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쇠고기 반대집회서 절정
경찰ㆍ시위대 충돌 방지
90년대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면서 시위와 진압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학가에서 최루탄과 화염병이 사라진 대신 노동자와 농민, 각종 이익단체가 새로운 형태의 시위와 집회 문화를 이끌었다. 2002년 미군장갑차 희생 여중생 추모 집회에 등장한 촛불행렬은 2004년 대통령 탄핵반대집회와 2005년 사학법개정 반대집회에 이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에서 절정을 이뤘다. 촛불행렬은 그 후에도 2011년 반값 등록금 촉구집회와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집회, 올해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최초의 경찰 차벽은 2002년 여중생 추모 촛불행렬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 그 후 대규모 집회 때마다 시위대를 에워싸는 차벽을 두고 경찰과 시위대가 부딪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의견과 오히려 과격시위를 부추긴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2005년 부산에서 APEC 반대 시위대를 봉쇄한 컨테이너 박스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 땐 광화문 네거리에 등장하기도 했다. 4.19혁명 때 이미 소방차를 활용한 물대포가 시위 진압에 쓰였다. 정식 시위진압용 살수차는 1989년 이스라엘로부터 대당 3억 9000만원에 2대를 수입한 것이 최초다. 현재 경찰이 보유한 살수차는 총 19대다.
복면 vs 캡사이신 및 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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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가스 막으려 사용… 채증 방어 목적도
불법행위 있는 경우만 채증 가능하지만…
80년대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는 최루가스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나 복면을 썼다. 사진채증에 대한 방어 목적도 있었다. 대학가는 물론 시내 중심가까지 최루가스로 뒤덮이기 일쑤였던 터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마스크나 손수건은 필수였다. 지난달 민중총궐기대회 이후 복면금지법안이 발의됐다. 복면시위를 묵인할 경우 폭력과 테러 같은 심각한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다. 시위와 진압의 과정이 지금보다 훨씬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던 80년대 복면금지법이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1998년 이후 최루탄 사용을 중지하는 대신 경찰은 헬기에서 최루액 섞은 물을 뿌리거나 물대포를 분사했다. 이미 이스라엘제 살수차가 도입된 1989년 국과수는 섞어 분사할 최루액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결론을 내놓기도 했다. 파바(PAVA)최루액이나 캡사이신 역시 안전성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체에 해로운 최루액과 더불어 과잉 채증 활동 역시 복면시위를 부추긴다는 시각도 있다. 불법행위가 벌어지거나 그럴 우려가 큰 경우에만 채증을 할 수 있고 합법적인 시위에서의 채증은 시위 참가자의 초상권 등 기본권 침해소지가 있다. 경찰은 최근 카메라와 망원렌즈 등 채증장비 교체 예산으로 15억여원을 배정 받았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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