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자 A씨는 올해 6월 서울 서초구의 한 투자사 사무실에서 회사 대표 이모(47)씨를 만났다. 이씨는 “자산가의 자금 4,000억~5,000억원을 관리하고 있다”며 “350억원을 투자형식으로 대출해줄 수 있으니 이행보조금 3억원을 입금하면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씨는 미심쩍어하는 A씨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산가가 회사 앞으로 1,100여억원을 입금한 통장을 보여줬다. 두 사람은 협상 끝에 보증금 5,000만원만 내기로 하고 투자 계약을 맺었다.
A씨는 약속한 날짜가 다가와도 돈이 들어오지 않자 재촉을 했고, 이씨는 수백억원이 입금된 다른 통장을 보여 주며 “급한 데 우선 들어갔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함께 은행을 찾아가 통장정리기에서 거래 내역을 정리한 뒤 돈이 빠져 나간 사실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돈은 입금되지 않았고 보증금 반환 요구도 들어주지 않자 A씨는 이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이씨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조사 결과 그는 돈이 없어 동생 집에 얹혀 살고 있었고 피해자에게 보여준 통장도 위조된 것이었다. 이씨 회사 명의로 된 통장 11개의 잔액은 적게는 2원, 가장 많은 것도 5만6,000원에 불과했다. 그는 발급 받은 통장의 맨 뒷면을 통장 정리기에 넣어 정리한 후 빈칸으로 남아 있는 첫 면에 얇은 양면테이프를 이용, 1,100억여원이 입금된 것처럼 위조한 내용을 붙이는 수법을 썼다. 통장의 가장 뒷면 내역을 정리기에 넣으면 정리기가 위조된 부분은 인식하지 못하는 점을 노린 것이다.
서울 서부경찰서는 이 같은 수법으로 피해자 14명으로부터 10억여원을 받아 가로챈 이씨 등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하고 김모(51)씨 등 10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들은 “경기 수원시의 대형 빌딩을 인수할 예정인데 철거권을 주겠다”며 보증금 명목으로 6명으로부터 3억원을 받아 챙기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씨 일당은 경찰이 추적에 나서 통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채권 100만주를 보유한 것처럼 꾸민 증권사 종합매매계좌 잔액증명내역서를 내세워 돈을 가로채는 등 끊임없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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