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닐 때 전시를 했다. 시안의 병마용갱, 가봤다.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가봤다. 대영박물관, 자연사, 고흐뮤지엄, 메트로폴리탄도 가봤다. 그런데 루브르는 안 가봤다. 마침 공연을 위한 답사 차 파리에 왔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나서 냉큼 가봤다. 그런데 달랐다. 일로 찾아갔던 박물관과 그저 둘러 보러 간 거기의 느낌이 달랐다. 시공을 넘어 인간의 위대함과 마주하는 벅찬 감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리.
파피루스를 보았다. 촘촘하고 빼곡히 상형문자로 그려낸 사자의 서. 보는 내내 경이에 차서 탄성을 질렀다. 얼마나 집중을 했으면 글자를 틀린 흔적이 단 한 번도 없을까. 오와 열을 맞춘 그 정교함이여. 옛날에 이집트 갔을 때 꽤 유명한 자히 하와스 박사와 악수를 한 적도 있었다. 유물위원회의 안내로 이집트박물관에 들렀다. 그 때 이미 수없이 많은 사자의 서, 수많은 미라의 관을 보았다. 당연히 투탕카멘도 보았다.
그러나 그 때는 긴장을 한 탓인지 그런 감흥이 없었다. 그저 대단하구나 하고 말았다. 이번 참은 아니다. 유물마다에서 작품마다에서 그것을 만들었을 장인과 예술가의 처절한 삶이 보인다. 예사롭지 않았다. 모나리자, 보았다. 달랐다. 내가 보았던 어느 잡지에서, 도록에서 본 모나리자가 아니다. 지금 내 앞에서 묘한 표정으로 먼데서 왔네 하듯 말을 걸어온다. 위대함 그 자체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이가 더 들어 안 보이던 게 보이는 탓일까. 회사 일이 아니라 그저 작품을 완상하는 관광객이니 여유가 생겨서일까. 전에는 안 보이던 그네들의 바빴을 일손이 보인다. 작품을 만들었을 당시 예술가들이 끝도 없이 흘렸을 땀과 노력, 열정과 희생, 환희가 보인다. 무엇이 그토록 그네들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차돌을 깎는 일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겨웠을까. 징을 대서 망치질을 수수만 번을 하고 얼마나 많은 날들 동안 돌을 갈고 닦았을까.
뿐이랴. 하나의 걸작을 완성시키는 동안 수도 없이 당면했을 고민과 고난, 고통이 눈앞에 선했다. 눈만 뜨면 연장을 들고 잠이 들면 꿈에서 그림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뿐이랴. 왕이나 귀족의 주문을 받았더라면 더더군다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납기일 맞추느라 강박과 공포에 시달렸을 것이다.
어느 순간 내 삶도 거울처럼 반사되어 보였다. 과연 나는 그 선인들이 살았을 인생의 치열함에 비할 바나 될까. 끝이 안 보이는 나의 부족함에 한숨만 터졌다. 그 분들은 모두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었을 것이다. 평생이든 아니든 간에 작품을 대하는 동안만큼은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삶을 송두리째 걸었을 것이다.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며 마음과 태도를 돌아봤다. 인생을 반성했다. 역시 속도는 여전히 상관이 없었다.
욕심도 내려놓아야 할 짐일 뿐. 꿈꾸는 무엇인가를 향해 한 발짝씩을 떼고 다시 붙이면 되는 것.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라고 왜 초조하지 않았으랴. 그러나 죽을 때까지만 이 작업을 완성하면 된다는 고지식한 신념이 작품의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아, 나는 조급하게도 살아왔구나. 엉덩이를 깨물려고 달려드는 개가 있다고만 믿었구나.
알프레드 뒤러의 펜촉처럼 더 집중하기. 나폴레옹 궁전에 깔린 양탄자처럼 더 섬세하기. 그렇지 않다면 내가 하는 연극에 있어 감동은 그야말로 요원할 것이다. 시간에 쫓길 일이 아니다. 될 때까지 늦춰야만 한다면 늦추는 게 맞다. 연극은 순간의 예술. 피어올랐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것. 그러다 보니 감정에 휘둘리고 그 순간을 모면하기만 하면 된다는 무성의한 논리를 즐겨 쓰느라 바빴다. 그러지 말아야지. 박물관에 들어갈 수 없는 직업이라고 설렁설렁 살지는 절대 말아야지.
그새 송년이다. 부어라 채워라, 하며 회포 풀 일만 남았다. 노상 그래왔다. 이번엔 덜 그러리. 기필코 차분히 차분히.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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