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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크리스마스 딜레마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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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크리스마스 딜레마를 넘어서

입력
2015.12.1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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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기독교라는 특정한 종교만이 아닌 보편적인 문화적 명절이 되고 있다. ‘크리스마스 쇼핑’은 익숙한 개념이 되었으며, 크리스마스는 쇼핑과 선물의 계절로 인식되고 있다. 선물을 위한 갖가지 상품들 그리고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로 가득한 백화점과 쇼핑몰들은 크리스마스의 의미란 쇼핑과 선물이라고 주입시킨다. 이러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는 것은 대중문화 속에 고착된 축제적 코드를 깨는 ‘문화적 죄(cultural sin)’를 짓는 것이다.

세계 인구의 30% 정도인 기독교인들의 명절이 세계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경제, 문화적 권력을 지니고 있는 서구의 종교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처음부터 기독교 전통 안에서 크리스마스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지켜져 온 것은 아니다. 17세기부터 서구에서는 경제 활성화의 목적으로 서서히 기독교 절기들이 대중적 명절로 디자인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소비를 종교적 절기와 연계시켜서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하는 상업주의가 크리스마스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된다. 기독교 절기와 상업주의의 만남을 통해서 ‘크리스마스 딜레마’가 시작되었다.

백화점들은 전통적인 서구 기독교 대성당들과 유사한 장식을 한다. 대성당들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려하게 건물을 장식하듯이 진열장을 화려한 색채로 장식한다. 대성당에서 연주되는 교회음악처럼 백화점에서도 음악이 있다. 크리스마스 음악을 들으며 쇼핑을 하는 것은 문화적 미덕일 뿐 아니라 종교적 미덕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서 미국 최초의 백화점 중의 하나인 필라델피아에 있는 워너메이커 (Wanamaker)는 고가의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고서 대성당과 같은 분위기에서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곤 한다. 교회에서만 듣던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이제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즐기면서 굳이 종교적 공간과 상업적 공간을 분리할 필요가 없게 된다. ‘상업의 절기’와 ‘구원의 절기’의 절묘한 교합이 바로 크리스마스 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준다는 산타클로스는, 착하게 사는 것이 곧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이라는 가치를 아이들 속에 주입한다. 착한 것이란 곧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라는 맹목적인 ‘순종의 메커니즘’이 물질적 선물을 통해서 각인된다. 비싼 선물을 주는 산타가 있는 부잣집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집 아이들보다 더 착한 사람이다. 산타 신화는 부모의 경제적 역량에 따라 형성되는 ‘착함의 위계주의’를 아이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한다. 하루에 2달러 이하로 살아가야 하는 세계 곳곳의 극도의 빈곤층 아이들에게 산타는 멋진 선물은커녕 먹을 양식조차 가져다 주지 않고 있으니 산타조차 외면하는 ‘나쁜’ 아이들인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현존 개념을 비판하면서 레비나스가 은유적으로 ‘현존은 결코 배고프지 않다(Dasein is never hungry)’라고 한 것처럼, 배가 불쑥 나오고 선물을 잔뜩 짊어지고 다니는 힘찬 목소리의 서양 할아버지 산타는 결코 배고픈 적이 없는 것 같다. 풍만한 배, 하얀 수염, 백인 얼굴, 건강한 몸, 명랑한 웃음과 함께 등장하는 산타는 크리스마스카드와 선물행사들을 통해서 물질 만능, 백인 중심, 남성 중심, 나이 차별, 장애 차별, 종교 차별 등의 다층적인 차별적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대중화한다.

크리스마스 자선 행사들은 그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절기적 행사로서의 자선 행위는 그 자선의 수혜자들이 왜 그토록 빈곤한 삶을 사는가라는 근원적 물음에는 무관심하다. 결국, 그러한 자선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의식 고양과 연대를 확보하는 데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구제와 정의의 근원적 차이가 바로 ‘왜’라는 물음의 존재 여부에 있음을 드러내는 경우이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 예수의 핵심적 가르침인 모든 인간의 존엄성, 사랑, 평등, 정의의 구현이 상업주의화된 구제 행위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는 호텔이나 저택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예수 탄생의 이야기가 이 21세기에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집 없는 노숙인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모든 사람을 고귀한 인간으로 보는 우주적 연민의 시선을 지닌 예수는 소비문화와 결탁한 상업주의적 크리스마스 속에 철저히 부재하다. 예수 탄생의 의미를 축하하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싶다면 예수처럼 이 세계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예민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저임금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비존재로 살아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육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 때문에 차별을 경험해야 하는 이들, 성별, 성적 성향 등 다양한 이유로 비인간 취급을 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 바로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메리 크리스마스’의 의미이다. 크리스마스란 약자들과의 연대 그리고 더욱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실천적 열정을 새롭게 다지는 절기가 되어야 한다.

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 값비싼 선물들, 가는 곳 마다 울려 퍼지는 신나는 캐럴들은 경제활성화의 장식물일 뿐 예수 정신과는 무관하다. 정의, 평등, 사랑, 평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헌신과는 상관 없는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반하는 절기일 뿐이다. 예수는 여우나 새도 집이 있지만 자신은 그러한 공간조차 없다고 하면서 사실상 노숙인으로서 그늘진 곳에 살아가던 주변부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크리스마스를 진정으로 축하하고 싶다면 예수의 가르침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 정의, 평화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학습과 더불어 구체적인 실천적 방안들을 모색하는 절기로 맞이하는 것이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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