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영화 캐릭터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재미 삼아 던진 질문이겠지만, 선뜻 대답이 안 나왔다. 선인과 악인, 잘난 자와 못난 자, 아름다운 자와 추한 자 등. 온갖 인물들이 떠올랐다. 잘 났다고 좋아하거나 나쁘다고 마냥 싫은 것도 아니었다. 아름다운 인물이 허물지는 걸 보며 공감할 때도, 강한 자가 궤멸하는 모습에 통쾌해 할 때도,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재미 삼아 떠올려본 인물들이지만, 갑자기 마음이 심란해졌다. 매혹을 느낀 인물들을 어떤 유형에 가둬 설명하기 어려웠다. 어떤 대칭적인 구도, 가령 배트맨과 조커, 보안관과 무법자, 정상인과 미치광이, 형사와 범죄자 등으로 나눠보면 후자 쪽으로 쏠리는 건 분명했다. 사랑을 얻은 자보다 사랑에 실패한 자, 오래 살아남는 자보다 한 순간 등장했다 불꽃같이 사라지는 캐릭터에게 더 눈이 갔다. 아름다운 여인도 보기 좋지만, 그 아름다움에 잠식돼 보다 선연하게 파멸하는 남녀의 모습에서 삶의 투명한 실체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게 나만의 유별난 취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행과 갈등 속에서 모든 이야기는 긴장을 갖는다. 내 일이 아니까, 말 그대로 영화일 뿐이니까, 보는 이는 즐거울 수 있는 거다. 갑자기 그 사실이 무서웠다. 그 어떤 캐릭터의 이름도 입에 담지 못했다. 모두 슬프게 망가진 사람들뿐인 게 섬뜩했던 거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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