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 이야기에 빠진 적 있다. 사랑을 위해 영원을 배회하는 슬픈 로맨스에 끌렸던 걸까. 아름다운 여인의 목덜미를 깨물어 선홍색 피를 탐식하는 모습에서 우아한 섹슈얼리티를 느꼈던 걸까.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 영화에서 멋들어지게 가공된 드라큘라 백작에겐 별 느낌 없었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고, 죽지 못해 사람의 피를 먹고, 사랑을 호소하나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불가해한 존재의 이중성이 가련했을 뿐이니까.
모든 설화가 그렇듯 흡혈귀 역시 사람의 어떤 존재 양상을 나타낸다. 속삭이는 말이 흉기가 되고, 사랑의 행위가 살인이 되며, 태생적 결함과 기형 탓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돼 슬픔을 분노로 키우는, 커다란 자기모순 속의 존재. 그게 딱히 설화 속 얘기만일까. 내가 그럴 수도, 네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멀쩡하게 잘 살다가 갑자기 치명적인 사랑에 빠졌거나, 오로지 자신만의 상처 안에 갇혀 살며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가 문득 외부를 향해 자신을 열어젖혔는데, 그 외부가 온통 배타적인 전쟁터 같다고 여겨질 때. 나는 손을 내밀었는데, 사람들이 그걸 칼로 받을 때. 나는 다만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라 호소하지만, 그 호소가 상대에게 피비린내로만 다가올 때, 우린 모두 잠깐 흡혈귀가 된다. 우아하지 않아도 섹시하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빈대나 거머리는 되지 말자 기도하면서.
강정ㆍ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