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란 말처럼 자주 사용되는 단어도 없지 싶다. 패션과 인테리어,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방식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입고 먹고 자는, 한 마디로 의식주란 기호체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이 트렌드다. 예전 프로방스풍 스타일이 인테리어의 주조라더니, 언제부터인가 북유럽이 대세라고 하고, 이제는 정갈함과 소박함을 무기로 하는 킨포크 스타일이 유행이란다. 패션에선 1950년대 오토바이를 몰던 거친 남자들의 상징, 바이커 재킷이 다시 유행이라며 한 벌 준비하란다. 2015년 한 해는 1970년대 복고풍 패션이 다양한 패션 품목에 접목되었다. 이렇게 패션과 음식, 레저 및 휴양을 포함한 모든 활동에는 개인의 선택과 집단의 취향이 혼재한다.
매년 연말이 되면 각종 트렌드 보고서들이 서점에 나온다. 지난해 사회 내부에서 부상하는 현상 중 주류가 될 만한 국부적인 것을 포착해 트렌드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도도한 힘의 일부인 것도 많지만, 한 시즌 유효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도 많다.
트렌드란 단어는 원래 16세기 후반, 강이나 해안선이 특정한 방향으로 휘어져서 흘러가는 양태를 설명하는 동사였다. 이런 단어가 19세기 후반, 사회 내부의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오늘날의 용법과 비슷하다. 또한 트렌드란 단어는 놀랍게도 원양항해에서 물길을 트고 따라가는 선원들이 ‘해류의 흐름을 따라 몸을 맡기다’라는 뜻으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트렌드의 개념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사회학에서는 트렌드를 ‘사회의 다수가 시대나 상황에 부합한다고 인식하여 일시적으로 받아들인 상태’라고 정의한다.
패션은 경쟁적으로 타인을 모방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사회적 놀이다. 고대부터 근대 초까지만 해도 인간의 패션은 상위계층의 옷을 모방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궁정 귀족들은 왕비의 헤어스타일과 드레스코드를 따라했다. 그들의 조율하는 실내공간의 가구배치 방식, 벽걸이용 걸개그림과 화로 위에 놓아두는 향로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기가 그지없었다. 왕은 행여나 과다하게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복제되는 걸 막기 위해 ‘사치 금지령’을 내려 자신의 권위와 위험을 보호하려고 했다. 테이블 차림에 올라갈 은수저의 개수까지 관여했다. 하지만 아무리 막아도 상위계층의 취향은 추종자 집단을 일종의 취향 공동체로 묶어내면서 지속적으로 사회 내부의 저층을 향해 흘렀다.
하지만 모방만이 유행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개인을 조종하는 또 다른 힘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개인을 초월하는 이 힘은 특정한 트렌드에 동조하도록 인간을 조종한다. 개인의 선택과 집단의 취향은 바로 이 중간에 자리한다. 근대의 패션은 백화점과 대량생산을 위한 재봉틀의 발명, 디자이너 집단의 세력화, 인공염색 기술의 발전이 엮이며 만들어낸 정신의 초상화다. 물론 여기엔 패션 저널리즘이라는 매체의 영향도 크게 한몫 한다. ‘일상을 예술로’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들이 19세기 후반의 유미주의자들이었다. 이때 영국의 저명한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2년간 패션잡지의 편집장을 맡아 가정 내 인테리어를 위한 ‘머스트 해브’ 아이템을 열심히 팔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인간은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거나 그렇지 못할 땐 예술작품을 입어야 한다”는 금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끝내주는 마케팅 전문가다.
개인들은 소비사회의 영향에 노출되면서 거대한 자본의 권력과 조정 능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자본주의는 세 가지 왕국의 혼합체‘라고 말한다. 바로 효율성의 지배를 받는 경제,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자아실현을 지상과제로 삼는 문화다. 문제는 이 세 가지는 가치추구 과정에서 갈등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화해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바로 트렌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트렌드는 갈등으로 가득한 우리 사회를 일시적으로 봉합해주는 국부적 수술인 셈이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며, 우리를 들뜨게 하고 끌어당긴 것들을 되돌아 볼 때다. 이런 반추의 과정이 있어야, 트렌드는 우리의 삶에서 긴 호흡이 되어 남는다.
김홍기ㆍ패션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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