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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전란속에 꽃피운 홍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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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자기]전란속에 꽃피운 홍무요

입력
2015.12.1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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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홍무유리홍전지목단옥호춘병

홍무자기는 시대적 특성으로 인해 귀하다.

홍무자기는 세계를 호령하던 몽고가 내부의 분열과 통합정치의 실패로 흔들리고 한족이 주원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인 명을 탄생시키던 시기에 탄생했다.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전란의 여파로 청색 유약의 수입이 어려워 국내 청화를 기본원료로 하여 토청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화기물의 발색은 전반적으로 어두웠으며 이 당시 유리홍자기가 유행했다. 홍무자기는 수량이 적어서 국제경매 가격이 비교적 높게 형성돼있다. 홍콩 국제경매에서는 20~30억원 선에서 낙찰되고 있다.

명대자기는 기본적으로 연호에 따라 특징이 구분되는데 황제별로 그 당시 운영된 관요 운영의 실체를 파악하면 그 특징을 알 수 있다.

명대 어기창은 황실용 그릇을 제작하는 장소이며 관요를 의미한다.

명대 어기창의 설치장소는 경덕진으로 강서성 부량현의 홍서향에 속하는 창강의 남쪽에 위치하여 창남진이라고도 불린다. 경덕진의 입지는 울창한 수목·높은 산·풍부한 물로 둘러싸인 곳으로 자기 생산에 좋은 환경이었다. 창강의 중심부에 있어 특히 수운이 발했다. 강물에 의한 풍부한 수력은 도자기의 원료를 세공하는 수차 등의 원시기계에 동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또 소성에 필요한 소나무가 풍부했고 인근 고령산 등에서 산출되는 질 좋고 자토의 채취도 용이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에 신평진이라 불린 경덕진은 한대부터 도기가 제작되었고 동진시대에 진이 설치되며 남조의 진대(557∼589)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도업을 실시했다. 송의 진종 경덕년간에 창남진에 감진을 설치하고 기물의 밑바닥에 경덕년제라고 쓰도록 명하였다. 이때부터 명성이 높아져 경덕진 자기로 통용되어 북송 진종 경덕원년에 경덕진으로 개명됐다.

남포의 '경덕진도록'에는 '홍무 2년 경덕진 주산 산록에 어기창을 설치하고 자기를 제작하여 상부에 공상하였으며, 이를 비로소 관자라 칭하고 민요와 차이를 두었다"고 되어 있다. 홍무 2년에 관요자기를 제작하는 창이 경덕진에 설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무연간의 도자는 전세품외에 남경 홍무궁지, 경덕진 주산 출토의 도자가 중요한 자료다.

남경 홍무궁지 유적은 1958년에 서 1964년에 걸쳐 남경박물원에 의해 조사되었다. '경덕진도록'에는 홍무자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홍무자기는 태토가 정세하고 매끄러우며 기벽이 얇고 문양은 청색과 흑색 두 종류가 있으며 순백의 백자가 아름답다'고 했다. 또 '채색자기 가운데 청화와 흑화 그리고 금채 호와 잔이 매우 뛰어나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어기창 백자는 내외 관리나 외국 사신에게 선물을 주기 위한 것으로 제작되었다. 예를 들어 남경 고궁유적에서는 '상사(賞賜)'라는 명문이 철화로 쓰인 백자 매병이 출토되었는데, 홍무연간 초기에 제적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황제가 관리들에게 사여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명조 황제가 관리에게 그릇을 수여하는 것은 명초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첸쩡샤는 '중한고미술협회'이사로 1,000여점의 중국도자기를 두루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C'는 중국도자기(Chinese ceramics)를 뜻한다.

채준 기자 dooria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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