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 공연의 메카였던 대학로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대표적인 대학로극장, 학전그린 등이 줄줄이 문을 닫은 뒤, 공연기획자ㆍ연출가ㆍ배우들이 새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배우 출신 감독이 운영하는 성동구 성수동 ‘두잉(Doing)’, 성북문화재단이 20여명의 예술인들에게 운영을 맡긴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공연 기획자가 만든 만능공연장 ‘서촌공간 서로’ 등이 잇따라 대학로 밖에서 문을 연다. 60석에서 112석 규모의 이 소극장들은 새로운 형식의 작품과 공연문화를 만들 ‘실험 극장’이다.
Doing: 실험적 공연에 대관료 0원
이달 말 문을 여는 Doing은 멀티플렉스 공연장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배원세(35) 극단 라피키 대표는 3일 “2011년부터 신사동에서 운영했던 영상제작 스튜디오를 이곳으로 이전해 절반은 스튜디오, 절반은 공연장으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400㎡(약 120평) 사무실의 절반인 200㎡을 가변형 극장과 카페로 꾸민다. 무대디자인에 따라 좌석 규모가 달라지지만 대략 70석이 가능하다. 우선 젊은 작가들의 낭독극, 미술품 전시부터 해볼 참이다. 의상, 신발 공장이 즐비한 주변 입지를 고려해 패션쇼 무대로도 대여할 수 있다.
이 극장의 시작은 극단 모시는사람들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배씨의 이력에서 비롯됐다. 데뷔 후 영화 ‘포화속으로’ ‘무방비도시’ 등에 출연하며 입지를 굳히던 그는 돌연 영화연출을 시작, 지난해 단편영화 ‘아버지란 이름으로’로 3분영화제 연출, 촬영, 조명상을 수상했다. 단편영화를 만드는 한편 신사동에 영상스튜디오를 차려 기업 홍보 동영상, 가요 뮤직비디오 등도 제작했다. 배씨는 “사업하고 영화 찍는 한편으로 가족극이나 신춘문예 등단작을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사업을 계속할지, 꿈을 좇을지 고민하다가 꿈을 좇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만든 작품이 오세혁 극작가의 ‘크리스마스에 30만원을 만날 확률’을 극화한 연극 ‘30만원의 기적’이었다. 배씨가 연출해 지난해 말 대학로 아트센터K, 올해 4월부터 6월까지 대학로 축제소극장에서 공연했는데 각각 150석, 100석인 두 극장의 임대료는 한달에 2,000만원, 600만원에 달했다. 몇 년 간 사업으로 벌어둔 6,000만원을 전부 털어부었는데도 결국 배우 출연료 지급도 힘들만큼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제작, 연출 맡은 첫 작품이라 더 그랬지만, 연극의 흥행성을 가늠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획, 홍보를 하니까 너무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공연 실험과 발표에 사용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배씨는 후배들에겐 이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다며 ‘극장 대여료 0원’이란 파격조건을 내걸었다. 스튜디오 사업과 공연장 한 켠에 만들 카페를 통해 운영비를 충당하겠다는 것이다. 이달 말 정식 개관하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대관 신청을 받는다.
미아리고개예술극장: 연극인들의 공공 극장
성북구 동소문로 고가도로 교각 아래에 있는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이하 미아리극장)은 성북문화재단이 20여명의 연극인들과 함께 운영하는 공공 극장이다. 옛 이름인 아리랑아트홀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성북구청이 다른 기관에 운영을 위탁했다가 성북문화재단으로 운영권을 이관했고, 7월부터 연극 연출가들이 운영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극장 운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자, 높은 임대료로 대학로 진출이 힘들어진 젊은 연출가들이 뜨겁게 호응했다. 현재는 성북구에 살고 있는 연출가 20여명이 주축이 돼 공연을 기획하고 참여 단체를 선정하며, 이런 결정 과정은 모두 기록으로 남긴다.
극장 운영에 참여하는 권석린 연출가(연극연구소 명랑거울 대표)는 “매주 목요일 극장운영을 논의하는 공유성북원탁회의를 여는데, 자주 출석해 아이디어를 내고 그만큼 발언권도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북문화재단의 직원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해 n분의 1 발언권을 갖고 아이디어를 낸다. 젊은 작가들의 신작을 소개하는 일요 낭독극장, 연출가들이 극장과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토크콘서트, 성북구 주민들과 함께하는 시민문화 연극교실, 어린이공연 등이 수십 차례 집단 회의를 통해 결정돼 제작극단 입찰공고를 거쳐 선보였다. 작품을 제작하는 극단에는 약간의 제작비가 지원되지만 연출가들의 활동비는 0원. 무일푼 노동에도 극장 청소, 매표소 페인트칠 같은 잡일까지 자처할 정도로 연출가들은 소명감을 갖고 참여하고 스스로 만족한다.
김세환 연출가(극단 드라마팩토리 대표)는 “처음에는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이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참여했는데, 극장의 공공성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단순히 대학로를 벗어나기보다, 공공 극장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색하는 극장”이라고 말했다.
서촌공간 서로: 캬바레연극제부터 국악까지
종로구 옥인동의 서촌공간 서로(이하 서로)는 대학로 잔뼈 굵은 공연기획자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만능공연장이다. 4층 건물의 2~4층에는 갤러리 룩스가 있고, 서로는 1층 카페와 지하 공연장을 운영한다. 이지연 대표는 2002년부터 대학로에서 무용, 연극, 국악 등을 기획?홍보했고 홍승욱 팀장은 뮤지컬, 막내인 목귀인씨는 연극 기획사에서 일했다.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4월 개관 이후 국악부터 클래식, 연극, 가요 콘서트까지 다종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50㎡(약 15평), 70석 극장은 내부만 보면 얼마 전 문을 닫은 삼일로창고극장과 비슷하다. 작지만 갖출 건 다 갖춰 무대 조명 음향 전문가가 무려 4명이다. 음향 좋다는 소문에 6월부터 선보인 클래식 기획공연 세계음악여행은 매달 매진을 기록하고, 4월 개관공연 선보인‘The One: 시작’ 중 판소리‘안이호’도 호황을 이뤘다.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신진국악인 공연 공모에도 당선돼 이달부터 다음달 16일까지 신진 국악실험무대 ‘별난 소리판’을 이어간다. 8개월여 운영한 끝에 1,2인극 연극과 낭독극, 국악과 클래식음악 쇼케이스를 강화할 계획이다. 내년 봄 연출가 이대웅, 시인 김경주 등이 만드는 동인 캬바레티스트의 음악극 시리즈도 선보인다.
“조용한 동네라 예상과 다른 관객 반응이 종종 나와요. ‘표 다 팔 수 있을까’ 생각했던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되고, 60석이 600석처럼 느껴지는 기획공연도 있죠. 대학로든 어디든 소극장은 그 극장만의 특화된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지연)
대학로를 소극장의 명소로 만들었던 예술가들의 그 실험 정신이 이제 대학로 밖에서 꽃피고 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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