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가 사대부 집안인데! 감히 그런 집안하고 어떻게!” 저녁 먹은 후엔 온 가족이 TV 앞에 둘러 앉아 뉴스와 연속극을 보던 게 일과였던 때의 이야기이니 꽤 되었다. 그때도 중년 여자탤런트들은 자식의 연애를 못마땅해 하고 결혼을 극렬히 반대하는 어머니 또는 예비 시어머니 역으로 출연하여 만인의 지탄을 받았다. 표독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밉살맞은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내뱉는 그들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들의 얄미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것은 어린 마음에도 뭔가 논리에 맞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사대부 집안’에서 사대부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흔히 말하는 뼈대 있는 또는 좋은 집안 정도로 이해하였고 ‘그런 집안’은 대개 그저 돈만 많은 집안 또는 별 볼일 없는 집안을 지칭할 경우로 들렸다. 나의 어린 시절은 겉으로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제적 능력 보다는 체면과 집안 등이 나름 존중되었던 시절로 기억되곤 한다.
“그때는 잘 사는 게 자랑이 아니었어. 그 친구가 약사하고 결혼했는데 우린 한참 뒤에 알았다니까…” 미식가 선생님을 모시고 잘 알려지지 않은 맛 집을 찾아다닐 때가 있었다. ‘비싼 맛 집은 맛 집이 아니다’라는 확고한 미식 철학을 가진 선생님을 모시고 시내 곳곳에 숨어 있는 허름한 음식점을 찾아다닐 적에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낭만적 글쓰기와 멋스런 생활로 잘 알려진 국학자 분이 자신과 국민학교 동창인데, 그 분의 여유로운 삶은 약사라는 직업을 가진 부인의 헌신 덕에 가능한 것이라 설명할 적에 나왔다. 의약분업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이니 약국을 경영했다 하면 동네 손꼽히는 유지 소리 듣던 때였다. 당신 세대에서는 조상대대로 내려왔건 처가의 덕이건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었건 남들보다 부유하게 사는 것이 자랑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하셨다.
돌이켜 보니 미식가 선생님의 젊은 시절만이 아니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 역시 그랬다. 그때만 해도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다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으니 가난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심지어 누가 더 가난한가를 늘어놓으며 낄낄대는 유치한 궁상을 떨기도 했다. 80년대는 변혁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점철된 격동의 시기였기에 ‘계급적 순수성’(?)을 드러내기 위한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 인기 절정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처럼 어머니들이 이웃의 어려운 형편을 미주알고주알 묻고 확인하며 함께 정을 나누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러다가 IMF 사태를 맞아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충격과 불안이 사회 전체를 강타한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IMF 사태를 겪은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고 믿을 건 오직 돈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히게 되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미녀 탤런트가 해맑게 웃으며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외치며 팔을 활짝 벌리는 광고를 볼 때의 충격은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 이전에는 머리에 떠올릴 수도, 입 밖으로 나올 수도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담뚜들도 자수성가하여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최고의 신랑감에서 배제했다고 전한다. 대를 이어 잘 살아야지 자수성가한 인간은 어딘가 모질고 독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나 보다. 개천에서 나온 용을 선호하지 않게 된 현실의 적나라한 반영이다.
‘개인의 자각과 발견’이야말로 근대의 시작이라고 배웠다. 근대에 들어 인류는 신분이나 혈연이라는 거추장스런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부와 혈연에 의한 기묘한 결합에 의해 근대의 성과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의식은 첨단을 달리지만 현실은 구태의연한 옛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이 괴상한 동거의 미래가 두렵다. 쓸데없는 근심을 기우라고 하던데 문자 그대로 기우에 그쳤으면 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일까.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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