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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 ℓ당 14원에 사서 500원 넘게 판매... "알라의 은총을 서구가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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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 ℓ당 14원에 사서 500원 넘게 판매... "알라의 은총을 서구가 약탈"

입력
2015.12.0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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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알 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지난 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168차 석유회담 개최 직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OPEC회원국은 산유량 감축 합의에 실패해 국제석유가격이 급락했다.빈=EPA 연합뉴스
알리 알 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지난 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OPEC 168차 석유회담 개최 직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OPEC회원국은 산유량 감축 합의에 실패해 국제석유가격이 급락했다.빈=EPA 연합뉴스

많은 무슬림들이 석유야말로 알라가 자신들에게 내려준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서구는 중동의 석유를 헐값으로 가져가 자신들의 자원을 약탈해 갔다고 믿고 있다. 이슬람 급진세력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더욱 강하다. 9.11테러를 일으켰던 오사마 빈 라덴의 선동문구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아랍의 석유 판매를 대행함으로써 노골적으로 그 수익을 도둑질해 왔다. 지난 25년 동안 석유 1배럴이 팔릴 때마다 미국은 135달러를 챙겼다. 이렇게 해서 중동이 도둑맞은 금액은 무려 하루 40억5,000만달러로 추산된다. 이것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둑질이었다. 이런 대규모 사기에 대해 세계 12억 무슬림 인구는 1인당 3,000만달러(약 330억 원)씩 보상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로레타 나폴레오니 지음, 이종인 옮김, 모던 지하드, 2004, 343쪽)

석유의 중요성이야 잘 알지만 도대체 얼마나 큰 수익이 남길래 강대국들이 중동에서 그토록 처절한 혈투를 벌이고 있는가?

중동의 석유가 알려진 것은 20세기가 시작되면서였다.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경쟁적으로 중동 석유의 중요성을 깨닫고, 채굴권과 생산, 판매를 독점하면서 수익을 올렸지만 그 중 산유국들에게 돌아가는 비중은 극히 미미했다.

20세기 석유 판매이익 산유국 철저히 소외

여기서 유가 속에 숨은 비밀부터 풀고 가자. 1배럴은 약 159ℓ이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된 1901년 이후 70여년 동안 국제시장에서 원유값은 배럴당 2달러 수준이었다. 1ℓ당 약 14원 꼴이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휘발유의 최종소비자 가격이 ℓ당 500~2,000원씩 하는걸 보면 얼마나 큰 폭리를 취해왔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시추, 채굴, 정유, 유통, 가공, 판매, 서비스의 거의 전 과정을 독점해 온 석유 메이저들이 벌어들인 금액은 거의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미국의 최대 석유회사 엑손의 1979년 매출액이 당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배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석유산업을 토대로 서방국가들은 오늘날 부유한 선진공업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산유국들의 유가 정상화와 석유산업 국유화 시도는 석유 재벌과 강대국의 폭거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었다. 참다 못한 산유국들은 1960년 생존권을 함께 지키자는 각오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창설해서 공동전선을 펴기로 했다. 그때는 아랍민족주의를 기치로 아랍 민중들의 자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할 때였다. OPEC의 결성은 이슬람 연대를 통해 석유 이권을 부분적이나마 되찾고자 하는 아랍의 강한 열망의 표시였다. 그러나 산유국을 다 합해도 그들의 영향력은 일개 석유 회사의 자국 지사장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불공정 계약으로 산유국이 생산이나 가격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었기 때문이다. 무모하게 석유 국유화를 시도했던 이란의 무함마드 모사데크 총리는 석유 재벌들의 압박과 미국의 군사개입으로 결국 1953년 8월 정권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원유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해 1969년에는 배럴당 1.29달러로 사상 최저치까지 떨어졌다.

무함마드 모사데크 전 이란 총리. 모사데크는 석유 국유화를 시도하다 미국 CIA가 배후조종으로 1953년 실각했다./2015-12-07(한국일보)
무함마드 모사데크 전 이란 총리. 모사데크는 석유 국유화를 시도하다 미국 CIA가 배후조종으로 1953년 실각했다./2015-12-07(한국일보)

카다피 등장 이후 산유국 목소리 커져

OPEC이 나름대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고, 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였다. 1969년 9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맨 먼저 석유 재벌들과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 석유가격 결정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OPEC 역사상 신기원이었다. 당시 리비아는 자국 석유에만 의존하던 최대 독립 석유회사인 옥시덴탈을 상대로 정부 지분율 인상 협상에 성공함으로써 다른 산유국들에게 좋은 선례가 되었다. 그 후 산유국들은 힘에 버거운 메이저 대신 작은 독립 석유회사들을 상대로 정부 지분율과 석유가 인상 협상에 성공했고, 결국 메이저들의 인상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런 힘이 결집되어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을 기점으로 산유국들은 석유 무기화에 성공했고, 국제 원유 시장의 수요-공급 원칙에 따른 ‘원유 제값 받기’ 정책이 시도됐다. 1973년 산유국들의 성공적인 카르텔 형성은 석유 재벌과 OPEC 간의 관계와 역할에 중대한 변화의 기점이 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통상 1.80달러로 유지되던 원유가가 1973년 여름에 3달러까지 상승하였다. 동시에 산유국들은 고시 가격 상승과 생산 증가로 인해 수입이 올랐기 때문에 석유 회사들의 무리한 요구에 대항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나아가 산유국들의 석유 회사들에 대한 협상 입지가 한층 강화되었고, 생산에 대한 산유국들의 통제력이 강화됐다. 특히 1973년 11월에 제4차 중동 전쟁의 여파로 국제 석유 가격이 6개월 사이에 4배로 폭등했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곧 이라크를 제외한 아랍 석유 수출국들이 생산량을 감축하였고, 미국 및 네덜란드 선적을 제한했다. 이런 일사불란한 생산량 삭감의 결과, 세계 원유 총 공급량이 5% 이상 떨어졌다. 아랍 산유국은 사우디산 원유의 새로운 고시 가격이 배럴당 11.69달러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당시 가장 충실한 친미 국가로 분류되어 석유 공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역사상 최악의 경제 위기를 맞았다. 이것이 제1차 석유 파동이다.

1974년부터 제2차 석유 파동 전인 1978년까지 석유 시장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그러나 1979년경 세계는 다시 제2차 석유 파동에 휘말렸다. 배럴당 12달러였던 석유 가격이 몇 차례에 걸쳐 36달러까지 치솟았고 이란 혁명의 여파를 타고 1979년 후반에 38달러에 달할 정도로 계속 인상됐다. 1981년부터는 유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가 생산을 감소시켜 OPEC의 생산량을 조절했으며, 석유의 실제 가격을 떨어뜨려 석유안정화 시대를 주도했다. 그 후 석유가는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약 20년 동안 배럴당 20~30달러 시대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제3세계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9ㆍ11 테러,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란 경제 제재 등으로 유가는 그 후 10여년 간 100달러 시대를 구가했다. 이 시기에 아랍산유국들은 유가혜택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국제관계의 첨예한 경쟁의 희생이 되면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미 이란 핵협상 타결과 석유의 국제정치학

냉전시대 미국과 구소련은 걸프석유와 카스피해 유전을 각각 양분하면서 독점적 에너지 체제를 유지해 왔다. 1989년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카스피해 유전에 힘의 공백이 생기자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 미국이 이를 방관할 리 없었다.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 카스피해 주변국들과 군사-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면서 사실상 카스피해 유전 통제권을 확보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걸프해와 카스피해 유전을 동시에 갖고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인 이란이 최대의 반미국가로 미국의 에너지 독점체제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이란만 회유한다면 두 유전을 연결하는 송유관을 통해 양대 에너지가 통합되고 대다수 미래학자들의 전망대로 적어도 2050년까지는 팍스아메리카나 시대가 보장될 수도 있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줄곧 반미노선을 고수하면서 36년간 미국의 경제제재에도 굴하지 않고 반미투쟁을 지속해 오고 있었다.

결국 미국이 우회하는 석유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이란 서쪽의 이라크와 동쪽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는 것은 이슬람세계에서는 상식으로 통한다. 그러나 전세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9.11 테러 명분으로 침공한 이라크 전쟁은 미국 철군 이후 대혼란 상태로 실패를 경험했고, 탈레반과 협상하면서 출구전략을 마련 중인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국의 실패가 눈앞에 다가온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라는 미국의 절대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과 이란이 전격적인 핵 협상을 타결한 배경이다. 세일가스와 신재생에너지 개발로 탈석유시대가 온다면 중동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 석유자원의 이용과 헤게모니를 통해 중동의 미래를 전망해보는 것도 이 시점에서 의미가 있겠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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