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가 평화의 도구가 되겠습니다.” 5일 2차 민중총궐기가 평화롭게 진행되는 데는 종교계의 잇단 호소와 중재 노력이 주효했다. 이들은 위헌 논란을 낳았던 경찰 차벽이 사라진 모습에 “작은 기적”이라는 반응을 내놨다.
불교, 개신교, 성공회, 원불교, 천도교 등 5개 종단 성직자와 신도로 구성된 종교인평화연대(가칭)는 이날 민중총궐기에 앞서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평화의 꽃길 기도회’를 열고 평화 집회를 염원했다.
평화 집회 개최를 중재해 온 대한불교 조계종 화쟁위원회가 “폭력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며 제안한 이날 기도회는 ‘위헌적 차벽 설치 반대와 안전한 집회 및 행진 보장을 위한 종교인 호소문 발표’를 주제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조계종 스님 50여명과 중앙승가대 학인 스님 100여명을 비롯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원불교 인권위원회, 천도교청년회,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소속 인사 등 10여개 단체 500여명이 참석했다.

형형색색의 거베라(국화과의 꽃)와 연꽃 등을 손에 든 이들은 호소문을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차이를 앞세운 배제와 다툼, 분열과 갈등의 논리는 이제 지양돼야 한다”며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ㆍ존중할 때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어 “자비는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하는 것”이라며 “오늘 이 호소와 작은 몸짓이 사회갈등을 녹여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거베라의 꽃말은 신비 혹은 수수께끼다.
참석자들은 특히 ▲위헌적 차벽 설치 중단할 것 ▲헌법이 보장하는 안전한 집회 및 행진의 자유를 보장할 것 ▲백남기씨에 대한 폭력진압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할 것 등을 요구했다. 각 종단별로 평화를 위한 기도 및 발원문 낭독도 이어졌다.
기도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불교 의식인 탑돌이를 본떠 서울광장 주변을 돌아 평화를 염원했다. 장삼과 가사를 두른 스님, 예복을 갖춘 사제와 교무, 인권을 상징하는 빛깔인 보라색 스카프를 맨 신도 등 500여명이 꽃을 들고 침묵 속에 묵상에 잠겨 한 줄로 광장 인근을 걷는 모습이 장관을 연출했다.

기도회를 위해 충북 청주에서 상경한 태고종 진화 스님은 “많은 국민들이 일용직, 비정규직으로 채용돼 고통 받고 ‘아프다’는 말이 ‘죽겠다’는 말로 변해가는 상황에 종교인들이 침묵할 순 없는 노릇”이라며 “평화집회에서 약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조계종 지인 스님은 “오해와 갈등의 두꺼운 외투는 물대포나 차벽이 아닌 소통과 경청이라는 햇볕이 벗길 수 있는 것 아니겠냐”며 “종교인들의 호소가 상호 경청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불교계 참석자들은 이날 기도회를 마치고 백남기씨가 입원 중인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찾아 백씨 가족들을 위로하고 쾌유를 비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종교계는 이날 집회가 평화적으로 마무리된 데 안도하는 표정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마련된 종교인평화연대는 앞으로도 평화로운 소통을 위한 문화 정착을 위해 뜻을 모은다는 계획이다.
화쟁위 정웅기 대변인은 이날 “차벽이 사라진 그 현상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라고도 생각된다”고 말했다. 대한성공회 유시경 신부 역시 “선진국에서 마땅히 보장돼야 할 표현의 자유가 우리 사회에서는 차벽 설치라는 왜곡된 상태로 억압 통제됐던 것이 종교계의 노력 등 여러 계기를 통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며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여론을 정부가 수용한 것으로 우리가 선진국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조계종 자정과쇄신결사추진본부 사무총장 혜조 스님은 “만연한 편 가르기 속에서 과연 불교계가 평화집회를 중재하고 이끌어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는 고민이 많았지만, 각계 각층에서 대승적으로 평화 염원에 공감한 덕분에 한 고비를 넘겼다”고 말했다. 이어 “조금이나마 종교계가 힘을 보탰다면 다행이나, 앞으로가 더 문제 아니겠냐”며 “영구적인 평화집회 정착을 위한 각계의 고민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달 17일 경찰 수배를 받고 있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조계종 총본사인 조계사로 피신해 조계종 산하 중재기구 화쟁위원회에 사안 중재를 요청했다. 요청을 수용한 화쟁위원회는 집회주최 측, 여야, 정부 등 각계에 집회의 보장 및 평화진행 등을 호소해왔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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