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이메일로 본 외교비사 … 대선 영향 판단 빌 리처드슨 방북 연기 밝혀져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이메일 스캔들이 터진 뒤 워싱턴 주재 한국 특파원이 월말에 챙겨야 할 게 한 가지 더 늘었습니다. 매월 말 미 국무부가 야금야금 공개하는 클린턴 전 장관의 개인 이메일을 검색하는 일이 바로 그 것입니다. 용의주도한 미 국무부가 외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부분은 미리 삭제하기는 하지만, 불과 2, 3년전 한미 관계의 깊숙한 내막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달 30일에는 미국이 2012년 18대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가늠해 볼 자료가 올라왔습니다.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호전되고, 그에 따라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미국 고위 인사의 방북을 국무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주저 앉혔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다음은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미국 민주당에서는 대표적인 북한통으로 통하는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가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승리한 직후인 12월26일 토머스 나이즈 국무부 부장관에게 보낸 이메일 전문입니다.
“이보게 톰. 자네들이 한국 대통령 선거 때문에 말렸던 나의 방북계획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려고 하네. (대선도 끝난 만큼) 1월 두 번째 주에 베이징을 거쳐서 북한에 가려고 하네. 언론에서 ‘미국 정부의 메시지를 갖고 가느냐’고 물으면, 이번 방북은 순전히 개인적이고 인도주의적 차원의 일이라고 말할 것이네. 우리는 북한에 가서, 핵 활동을 중지하고 억류한 미국 시민을 석방하라고 요구할 것일세. 그리고 우리가 돌아오는 길에 당신네들이 원한다면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브리핑할 생각이네. 나의 방북이 국무부 고위층 그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번만큼은 또다시 방북 계획을 연기시키기 위한 공작을 펴지는 말아주게. 나는 어쨌든 미국 정부 정책에 협조적이며 국익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네. 아 그리고, 즐거운 명절이 되길 바라네. 며칠 전 의회 청문회에서도 자네가 잘 한 것 같더군. 그럼 이만 줄이겠네. 빌.”
클린턴 전 장관의 외교안보 핵심 측근인 토머스 부장관을 톰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메일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짐작은 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던 미국 외교의 뒷모습을 아주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이메일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언론에는 중구난방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도 미국 각계각층의 대북 접촉이 실상은 국무부와 철저한 사전 조율 끝에 이뤄지며 ▦제 아무리 전 주지사라도 국무부가 반대하면 당초 잡았던 방북 계획을 연기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외교 당국의 힘이 세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건 미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의 정치에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드러난 것입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겠지만, 미 국무부가 당시 방북을 허용했더라면 한국 대선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당시 18대 대선은 박근혜 51.6%(1,577만표)대 문재인 48.0%(1,469만표)라는 박빙 승부였으며 대북 정책이 핵심 이슈였습니다. 미 국무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리처드슨 전 지사의 방북으로 북미관계가 호전됐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까요. 남북 해빙 무드가 조성됐다면 상황은 매우 유동적이었을 겁니다.
사실 미국이 한국의 대통령 자리에 관심을 기울인 건 물론 이때가 처음은 아닙니다. 미 의회 대표단이 1980년 한국을 방문해 야권 지도자인 김대중과 김영삼을 만나 당시 정국 상황과 대선 출마 가능성을 물어본 것 역시 국무부 전문으로 확인됩니다.
한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미 관계에서 미국의 지렛대가 여전히 크고 다양하다는 게 외교 전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조철환=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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