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포털 삭제 조치 강력하지만
불법적 요소 없는 게시물까지
차단 요청 땐 무분별하게 지워
삭제율 95%로 구글의 두 배
표현의 자유 논란 일으켜
건건이 신고 받는 구조 탓
사생활 지키기엔 역부족
인터넷과 SNS로 인한 사생활 침해 폐해로 세계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 문제는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잊힐 권리는 1995년 유럽연합(EU)의 ‘유럽 개인정보 보호규정 및 지침’에서 처음 언급됐다. 2009년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가 자신의 채무와 부동산 강제경매에 관한 기사 내용이 구글에서 더 이상 검색되지 않게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유럽사법재판소가 받아들이면서 2012년 ‘개인정보 보호규정’으로 상향 입법 논의로 본격화했다.
우리의 경우 2007년부터 포털 정보통신망법상 ‘임시조치’라는 삭제 제도를 도입, 운영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강력하다 보니 오히려 알 권리 논란이 야기되는 상황이다.
●알 권리 논란 부르는 포털의 임시조치
임시조치 절차는 이렇다. 포털 게시물로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당사자가 삭제를 요청할 경우 포털 사업자는 일단 30일 동안 해당 글을 차단 하고, 차단의 부당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영구 삭제한다. 실제 네이버, 다음에 요청된 임시조치는 지난해 각각 33만7,923건, 11만6,261건으로 5년 전과 비교하면 각각 4배, 2배 늘었다. 이의제기는 불과 1만7,515건, 3,819건으로 양사 모두 95% 가까이 삭제했다. 사실상 대부분 지워지는 것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임시조치는 누구의 프라이버시도 침해하지 않고, 불법적 요소가 없는 게시물도 차단 요청만 하면 거의 다 삭제해 준다”며 “구글에 대한 스페인 판결보다 훨씬 폭넓고 강력한 조치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요소가 크다”고 지적했다. 구글의 경우 링크 삭제를 하지만 우리는 정보 자체를 없애 버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포털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소송 부담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수세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검색엔진 개인사업자에게 과연 명예훼손 관련 사항을 따져 삭제 할 권한을 맡기는 게 온당한가 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때문에 방통위가 ‘온라인 명예훼손 분쟁조정위원회’ 신설을 골자로 한 임시조치 관련 개정안을 지난해 국회에 제출했으나 오히려 새로운 표현의 자유 제한기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 교수는 “삭제 단계부터 기구에서 접수를 받아 논의하겠다는 게 아니라 삭제 신청은 포털에 하되 복원 신청에 대해 위원회를 만들어 심사하겠다는 것”이라며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개악안이라고 혹평했다. 몰카, 동영상 등 개인 프라이버시가 담긴 전통적인 ‘잊힐 권리’는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지만, 정치인이나 유명인 등이 평판 관리를 위해 정보를 함부로 삭제하는 등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가 침해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다른 나라의 주요 포털사이트 사업자들도 삭제권을 자율 이행하고 있지만 자세가 다르다. 세계 최대 검색엔진인 구글의 경우 EU국가 사용자들의 구글 검색 삭제 요청 수용률은 42%밖에 되지 않는다. 구글은 민감한 개인정보 외에 다툼이 있을 만한 자료를 없애는 걸 꺼리고 있다. 게시글 등 개인 사생활 영역에는 관대하지만, 자신의 범죄행위를 세탁할 목적으로 기사 삭제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엄격한 기준을 보이며, 정치인이나 종교인, 유명연예인, CEO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실제 삭제 요구나 소송으로 비화한 경우를 보면 범죄행위와 관련한 언론 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작 유출 동영상 등은 지우기 쉽지 않아
그러나 정작 몰래 유출된 동영상 등 프라이버시 문제로 꼭 삭제 해야 할 개인적 흔적은 인터넷상에서 지우기 쉽지 않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개인방송 BJ로 활동한 Y씨는 방송 중 가슴 노출을 한 적이 있는데, 유튜브는 물론 해외 사이트에 공유되어 주변 사람들이 알아보면서 대인기피증까지 왔다. 영상을 삭제하려 백방으로 매달렸지만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해당 게시물이 올려져 있는 사이트를 일일이 찾아 포털에 신고해야 하는데 사실상 개인이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디지털 세탁소’ 또는 ‘디지털 장의사’로 불리는 인터넷 정보 삭제 서비스가 최근 각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도 모르는 인터넷 흔적 찾기, 명예훼손성 게시글 삭제, 온라인 평판 관리 등이 주요 업무다.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 김호진 대표는 “일일이 사이트를 다니며 지워야 하는 수작업인데 수천, 수만개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개인 역량을 벗어나 있다”며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내가 올린, 또는 해킹 당한 게시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옥스퍼드대 인터넷연구소 교수인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는 저서 ‘잊혀질 권리(Delete)’에서 정보 만료일을 부여해 일정 기간만 유통되고 폐기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메시지를 읽으면 몇 초 안에 삭제되는 스냅챗 같은 휘발성 메신저가 인기다. 자신의 흔적이나 개인정보 유출에 불안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만큼 늘고 있다는 의미다.
모든 행위가 기록되고 검색되는 웹 세상에서 내가 올렸다 하더라도 그 정보의 점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진정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다면 처음부터 인터넷에 올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지인들의 SNS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 일탈 행동과 결별하기 위해서 모든 젊은이가 성인이 되는 순간 이름을 바꿔야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미국 한 정보통신 매체는 단 30분 만의 구글링을 통해 슈미트의 재산과 거주지, 파티 비용, 취미활동 등 개인정보를 얻어 내기도 했다. 슈미트마저도 이 지경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 내용을 담아 사진까지 첨부해 올리는 시대에 개인 발자취를 추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대부분의 SNS가 위치기반 서비스를 연동해 동선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는 날로 커지고 있지만 경각심은 여전히 낮다.
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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