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죄, 히틀러에게 씌우지 말라” 독일인에 나치 책임 다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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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죄, 히틀러에게 씌우지 말라” 독일인에 나치 책임 다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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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5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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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몸젠은 제3제국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나치 소수권력자에게 돌리는 것은 옳지도 않을뿐더러 나치즘을 가능케 한 보수 군부와 행정 엘리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가의 임무는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쓸만한 버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끊임없이 개입함으로써 보다 긍정적인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홀로코스트추모박물관 인터뷰 화면.

유명 역사학자 가문 출생

증조할아버지는 노벨상 수상자

나치에 부역한 아버지 연구 위해

국가사회주의 전공 사학자로

한스 몸젠(Hans Mommsen)은 히틀러를 ‘나약한 독재자(Weak Dictator)’라 규정한 독일의 역사학자다. 그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와 나치 소수 권력자들이 장기적으로 기획한 결과가 아니라, 2차 대전 말기 전시 상황에서 하위 관료와 군부가 우발적으로, 하지만 경쟁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자행한 만행이며 히틀러는 승인 혹은 묵인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치즘의 제3제국이 히틀러 개인이나 국가노동자당의 지배 하에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된 국가가 아니라고, 스탈린의 소비에트 전체주의 국가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80년대 독일 ‘역사가 논쟁’을 비롯한 숱한 논쟁의 선봉에 섰다. 몸젠은 당시의 주류적 견해, 즉 제3제국의 탄생과 전개를 독재자의 이데올로기와 핵심 하수인들의 의도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의도주의(intentionalism)적 관점이 사실을 왜곡하고 제3제국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와 극소수 전범들에게 떠넘김으로써 나치즘을 떠받친 독일의 엘리트 관료들과 보수 군부, 법원 등등 하위 사회조직과 구성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타협적 해석이며, 그럼으로써 나치즘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현대 독일과 독일인들이 제3제국 이전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서부터 간직해온 민족주의, 이른바 대독일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정서적ㆍ이념적 터전을 마련해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능주의(functionalism, 정치인의 의도보다는 환경과 상황, 구조를 중심에 두는 관점) 학자들과 더불어 우파학계의 거물들, 예컨대 에른스트 놀테나 힐데브란트 등에 맞서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싸웠다. 85세 생일이던 11월 5일 그가 별세했다.

한스 몸젠은 1930년 11월 5일 독일의 고명한 역사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저명한 고전학자이자 역사학자로서, ‘로마사’로 노벨문학상(1902)을 탄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esn,1817~1903)이 그의 증조할아버지다. 아버지(빌헬름 몸젠, 1892~1966)도 비스마르크 연구로 저명한 사학자였고, 그의 쌍둥이 형 볼프강(Wlofgang 1930~2004)도 역사학자였다. 그가 역사학을 하게 된 데는 가풍의 영향이 큰 듯하지만, 그는 “결코 원치 않은 선택이었다”고 “(나도 형도) 마지못해 된 역사학자(reluctant historian)”라고 말했다. 2004년 미국 홀로코스트추모박물관 구술사학자 조안 링겔하임(Joan Ringelheim)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정말 역사학을 피하고 싶었다. 볼프강은 처음엔 물리학을 전공했고, 철학에 관심을 갖더니 역사철학으로, 결국 역사학으로 가더라. 나 역시 첫 전공은 언어학(독일어)이었다. (피하려 했던 건) 당신도 알다시피 가족(아버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http://collections.ushmm.org/search/catalog/irn507297)

나치에 부역한 아버지 빌헬름은 45년 교직에서 쫓겨났다. 훗날 명예교수로 복직해 강의를 했지만, 한동안 그의 형제들은 가난뿐 아니라 역사의 죄인이 된 듯한 삶을 살아야 했다. 칩거한 채 저술작업에 몰두했던 아버지를 돕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책과 사료(史料)들을 읽게 됐고…, 뭐 그런 얘기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 마르부르크대학에서 독일어와 철학, 역사를 공부하고 59년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세기 연구, 독일 노동운동사 연구를 거쳐, 그가 도달한 곳은 결국 국가사회주의 분야였다. “우리 세대에게는 일종의 증상 같은 거였어요. ‘왜 내 아버지 세대는 히틀러를 수용하고 추종해야 했을까’ 그건 피할 수 없는 문제였죠. 나치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고, 나치 권력은 어떻게 작동했나…. 그리고 다시 19세기를 보는 겁니다. 나치 이전, 독일 정치가 기형화한 근본적인 이유를 탐색하는 거죠.” 그는 튀빙겐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강의했고, 68년 보쿰대학으로 옮겨 96년 은퇴할 때까지 재직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 전공 사학자가 된 훗날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전후 당국의 처사가, 그보다 훨씬 죄질이 저열한 학자들의 경우에 비춰 가혹한 것이었다고 말했다.(가디언, 2015.11.12)

1933년 2월 27일 국가의회 의사당 방화사건. 히틀러는 저 사건 직후 의회에서 공산주의자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다.

몸젠은 나치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인 1933년 2월의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나치가 기획한 사건이 아니라 한 공산주의자의 우발 범행이며, 다만 나치는 그 사건을 잽싸게 이용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에 공개적으로 동조한 첫 역사가였다. 프리츠 토비아스(Fritz Tobias)라는 저널리스트가 61년 ‘의사당 화재(Reichstag Fire)’라는 책을 통해 처음 저 주장을 제기하기까지, 학계는 방화사건이 의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치가 주도한 뒤 공산당에 덮어 씌운 사건이라 여겼다. ‘괴링 기획설’ 등을 제기하는 이들이 지금도 있긴 하지만, 이제 저 사건은 네덜란드 출신의 한 실직 노동자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이란 게 정설이다. 몸젠은 나치가 정교한 시나리오에 의해 권력을 장악했고 대다수 독일 국민들은 다만 ‘부주의한 방관자(hapless bystanders)’로서 나치의 시나리오에 순진하게 이용당한 것이 아니라, 나치는 다만 기회를 잽싸게 포착해 이용했고 독일의 반공산주의 보수 지배 엘리트와 기업인, 전통 귀족, 고위 관료, 법관, 무엇보다 군부 지도자들이 거기 열정적으로 동조함으로써 나치 권력의 등을 떠밀었다고 주장했다.

나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레니 리펜슈탈, 35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장면.

“히틀러는 나약한 독재자”

“우유부단하고 특권 유지에 관심

홀로코스트 지시 안 했다” 주장

제3제국의 구조적 문제에 천착

몸젠은 제3제국 권력 구조와 작동 방식도, 나치 전당대회장의 매스게임 같은 이미지와 달리, 히틀러와 나치 당의 명령이 신경망처럼 퍼져 지방정부와 군 하부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게 아니라고, 즉 전체주의가 아니라 주장했다.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열적인 정권(incredibly disorganized regime)’이었다는 것, 관료집단끼리 중소권력자들끼리 중앙과 지방 정부가 서로 권력을 두고 상시적으로 맞서고 경쟁하면서 역설적으로 역동성을 발휘한 권력이었다고 주장했다. 몸젠과 함께 60년대 초 뮌헨의 독일현대사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고, 평생 학문적 동지로 지낸 마르틴 브로샤트(Martin Broszat, 1926~1989)는 ‘히틀러 국가- 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김학이 옮김, 문학과지성사)에서 제3제국 권력구조와 지배형태에 대한 몸젠의 저 입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몸젠은 ‘제3제국의 공직자들(1966)’ 등 다수의 책을 썼지만 국내 번역된 건 없다.) “그 동안 다양한 정치학자들이 전체주의라는 포괄적 개념을 이용하거나 ‘지배기술’이라는 매우 기괴한 개념을 동원하여, 나치즘을 단일체적인 거대한 권력 시스템, 혹은 마키아벨리즘적으로 체계화된 슈퍼국가로 상정해왔다. 그와 달리 최근의 전문적인 연구들은 하나같이 나치 권력 행사의 무체계성, 즉흥성, 비통일성을 증명하고 있다.”(머리말 발췌) 브로샤트는 하지만 나치의 “비합리적인 충동적 전복 의지와 아나키스트적 행동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나치의 지배 형태를 하나의 공통분모로 축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염려하며 ‘히틀러 국가’라는 독자적인 입장을 내놨다. 그는 나치즘의 핵심을 ‘원민중적(Volisch) 민족주의’ 즉 “역사에 앞서 존재하되 미래에 완성될 유토피아적인 기대”에 근거한 모호한 세계관적 이념이라 설명했고, 분권적 국가사회주의당이 지탱된 것은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 충성 관계(지도자 원칙) 덕이었다고 주장했다. 동아대 김학이 교수는 “그의 지배는 관료제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었”고 “나치당의 권력 배분 역시 히틀러의 개인적 지배권을 위임 받느냐에 달려 있었다”고 풀이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쉰들러리스트(1993)’ 한 장면. 몸젠은 홀로코스트가 하위 권력의 충성경쟁을 통해 촉발된 만행이었다고 주장했다.

독일 민족주의 발호에 경종

“사악한 결정 책임 히틀러에 떠넘겨

일반 독일인엔 면죄부 줬다” 비판

대독일주의 부활 경계에 앞장서

몸젠은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기원(originator)’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최종적 해결(final solution)’을 구두로나 문서로 판단하거나 지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었지만, 그들을 말살하는 것과 나라 바깥으로 몰아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1941년까지 유대인 말살 개념은 어디에도 없었다.”(예루살렘 SHOAH Resource Center 1997.12.12일 인터뷰)

인터뷰에서 그는 “19세기 반유대주의와 21세기 초의 반유대주의, 그리고 나치의 그것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르고 달라졌는지가 근원적인 의문이다. 19세기 말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던 나치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의 파시스트적 성격과 전쟁 상황과 결합하면서 악성으로 변질했다. 한나 아렌트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학살이 일상적인 일이 되면서 (홀로코스트도) 더 이상 예외적인 일이 아니게 된 거였다.” 전쟁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분권화한 하위 관료ㆍ군사 집단이 “자신들의 근면성과 조직적 효율성을 과시하고, 정치적 긴요함을 입증하려는”과정에서 홀로코스트가 시작됐고,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는 다만 사후적으로 승인했다는 게 몸젠을 비롯한 기능주의자들의 판단이었다. 그 과정을 몸젠은 ‘누진적 과격화(Cumulative Radicaliz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고, 그것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현실화(Realization of the Unthinkable, 83년 저서의 제목)’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결정하는 걸 기피했고, 입장 역시 불분명했고, 오직 개인적 권위와 지도자로서의 특권을 유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어떤 면으로는 나약한 독재자였다.” 그러므로 우파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듯 나치즘을 스탈린 전체주의와 대등하게 놓거나 에른스트의 놀테처럼 ‘굴락 수용소’와 홀로코스트에서 모종의 인과성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그로선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국가는 철저히 소련공산당의 지배 하에 있었던 반면, 나치 치하에서 국가사회주의당과 국가는 권력(히틀러의 신임)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영국의 현대사학자 이안 커쇼(Ian Kershaw)는 ‘나치의 독재 The Nazi Dictatorship’라는 책에서 몸젠의 관점을 집약하며, 제3제국 외교정책의 비일관성과 위기에 대응하는 임기응변식 국내정책, 명령 계통의 비체계성 등을 근거로 “히틀러도, 나치 정권의 그 누구도 유토피아의 모호한 이상 외에 장기적이고도 정밀한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제3제국은 서로 난투하는 경쟁 기구들의 잡동사니일 뿐(simply a jumble of rival institutions feuding with one another)이었다”고 썼다. 나치시대 연구가 ‘히틀러 현상’연구와 동일시되고 나치의 모든 사악한 결정과 에너지가 오직 히틀러에게서 비롯된 것처럼 과장됨으로써,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독일 사회 내부의 광범위한 요소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몸젠은 주장했다.

저 주장들은 의도주의 학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더욱 정교해졌다. 히틀러의 인종 개념을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에 대한 답변, 즉 “계급 살해(스탈린 체제의 굴락)로부터 인종살해(홀로코스트)의 의도가 근원적으로 출현했다”고 주장한 에른스트 놀테(‘에른스트 놀테와의 대화’, 지그프리트 게를리히 , 유은상 옮김) 에 대해 몸젠은 나치 범죄를 스탈린 전체주의에 대비해 ‘상대화(relativize)’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하며, 홀로코스트는 19세기 독일 보수 관료집단들의 이념과 사상 속에 내장돼 있던 반유대주의가 나치즘과 만나 폭력적으로 발현된 ‘특이한(singular)’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와 나치 범죄를 포개려는 시도는, 냉전 체제 하에서 공산주의와 나치 범죄를 버무려 함께 폐기하려는 시도일 뿐이며, 그럼으로써 ‘선량한’ 독일 역사를 걸러내 민족주의의 부활에 힘을 실으려는 기획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역사가의 임무는 독일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쓸만한 버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끊임없이 개입함으로써 보다 긍정적인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행간에서 짙게 드러나듯 그의 나치즘 연구 배면에는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놓여 있었다.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 운동의 다양성 연구도 그 일환이었다. 예컨대 전후 독일이 민족적 이성의 근거인 양 부각하는 ‘라슈텐부르크 암살기도 사건(July Plotㆍ1944년 7월 반나치 군부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몸젠은 7월 사건의 주역들 역시 보수 민족주의 군부 엘리트이며, 그들이 나치 전복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대독일주의 국가가 제3제국을 대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히틀러의 지시로 페르디난드 포르셰가 1936년 첫 모델을 낸 국민차 ‘폭스바겐’.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Telegraph)는 몸젠이 86년 폭스바겐 경영위원회 의장이던 칼 한(Carl Hahn)의 의뢰를 받아 제3제국 치하의 폭스바겐 역사를 연구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차를 원했고, 폭스바겐 사는 전체 노동력의 70%를 나치 정권으로부터 공급받았다. 대부분 전쟁포로와 노동강제수용소 수감자, 동유럽에서 끌고 온 여성들이었다. 몸젠은 SS친위대가 공장에 상주하며 나치 인종 위계에 따라 노동 조직과 작업규율을 감독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작업하다가 또 맞아서 숨졌고, 여성 노동자가 아이를 낳으면 의도적으로 굶겨 죽였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2015.11.13)

그와 브로샤트 등의 기능주의 역사관은 히틀러와 베를린 핵심권력, 나치 이데올로기를 과소평가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나치즘과 제3제국 뒤에 숨은 대독일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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