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판결로 광장은 돌아왔지만
집회 방식은 80년대 방식 그대로
시민 이해ㆍ공감 얻을 대안 찾아야
보기 좋게 명중한 펀치. 오늘 열릴 2차 민중총궐기 집회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딱 그랬다. 오늘 집회를 단단히 벼르던 정부는 머쓱하게 됐다. 정부는 이 참에 서울광장, 광화문광장에서 집회ㆍ시위의 싹을 잘라 버리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듣도 보도 못한 ‘차명 집회’니, 평화적 개최를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이니 하는 얼토당토 않은 이유와 조건을 내걸 까닭이 없다. 집회는 신고대상일 뿐이고, 광장은 시민들 소유인데도 정부는 배타적이고 경직된 태도, 고압적인 엄포로 일관하다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경찰이 체포전담 기동대를 투입하는 공격적 진압을 예고한 대목은 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기동대가 어떤 곳인가.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과잉 폭력진압으로 비난을 받은 부대다. 이들에게 집회현장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체포토록 했다니 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 악명 높던 백골단이 떠오른다.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무너지면 이 조직은 언제든 국민 기본권을 짓밟는 선두에 설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검찰은 또 어떤가. 김수남 신임 검찰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헌법가치 부정세력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내세웠다. 당연하다. 대한민국 헌법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신은 어떤 경우라도 수호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단한 시민 통행로 없는 차벽은 누가 설치했나. “미신고란 이유만으로 집회를 해산하는 것은 집회의 사전신고제를 허가제처럼 운용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한 대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거스른 쪽은 어디인가. 제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끌만 보려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법원은 “집회금지는 허용 가능성을 최대한 살핀 뒤 제한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강(强) 대 강(强)의 충돌이 예상되던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라 도드라져 보이지만 기존 판례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판단이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기본적으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되 예외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경우를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헌재와 대법원은 헌법상 집회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왔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검찰과 경찰이 일어나지도 않은 폭력시위를 부각해 집회를 금지한 것은 권한을 넘어선 자의적 법 집행이다.
법원의 판결로 광장은 다시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2차 민중총궐기 집회는 평화롭게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서울 도심에서 벌이는 대규모 집회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엄혹했던 80년대를 뒤로 하고 사반세기의 시간이 지났지만 대규모 집회의 유형과 행태는 80년대식을 답습하고 있다. 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가두행진을 하다 청와대로 방향을 틀어 대치하던 경찰과 격렬하게 맞서는 모습은 80년대의 그것과 판박이다. 집회 이유와 배경, 목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불법과 폭력성, 시민 불편만 집중 부각되는 것도 똑같다. 일시적 카타르시스는 느끼겠지만 집회를 통해 해결하려던 본질적 문제는 미해결인 채 남게 되는 것도 여전하다.
집회의 목적은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내세우고 전달해서 관철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회는 집회 자체가 목적이 돼버렸다. 이래서는 집회를 통한 이해와 공감의 확산을 일으키기 어렵다. 집회가 늘 청와대를 향하고, 정부를 겨누고 할 필요는 없다. 시민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힘을 정부가 느끼도록 하고, 궁극적으로는 투표행위를 통해 표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그러려면 열린 광장에서 좀 더 시민에게 다가가는 집회가 열리고, 토론이 일어나고, 설득이 이뤄지게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집회의 원래 목적이 하나씩 달성돼 나가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
어렵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열린 광장을 채울 그런 형태의 집회방식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광장은 시민의 것이기에 광장의 가치를 보호하고 키워가는 주체 또한 시민임을 자각할 때다.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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