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질환으로 고통 받는 어린이를 돕는 모금 운동에 반대합니다. 모금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책임을 촉구하는 겁니다. 의료비 모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생명은 포기해야 하는 겁니까. 국민건강보험으로 십수조 원의 흑자를 내면서 어린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5,000억원을 쓰는 데 인색한 이 나라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나라입니까.”
이명묵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대표는 1일 서울 당산동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 교육장에서 열린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에 대한 토론회’에서 “질병으로 인한 어린이와 부모의 고통은 국민 연대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며 정부가 어린이의 의료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1989년 유엔이 채택한 국제아동권리협약의 네 가지 권리인 생존권ㆍ보호권ㆍ발달권ㆍ참여권 가운데 어린이의 건강과 생명을 보장하는 생존권이 첫째라는 점이 이날 토론회를 마련한 15개 민간 복지단체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들 단체는 최근 어린이 병원비 국가보장연대를 결성해 이날 토론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어린이 무상 의료 정책은 2008년 노무현 정부가 6세 미만을 대상으로 도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반대 여론에 밀려 2년 만에 폐기됐다. 김종명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의료팀장은 “건강보험 누적 흑자가 지난해까지 13조원에 달하고 올해는 8월 말까지만 해도 16조원의 누적 흑자를 기록했는데 이 같은 흑자 재원을 보장성 확대에 사용하지 않는 현실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입원비 보장률은 59.8%로 90%가 넘는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프랑스 일본은 물론 OECD 회원국 평균(85.8%)에도 훨씬 못 미친다. 김종명 팀장은 “고액 진료비는 외래진료비나 약제비보다 입원진료비에서 특히 많이 발생하는데 지난해 기준 0~14세의 입원진료비 본인 부담금 총액은 4,863억원이었다”며 “청소년에 해당하는 19세까지 확대한다 해도 6,000억원 정도면 국가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입원비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액 병원비가 발생하는 외래와 약제비는 제외하고 고액진료비가 발생하는 입원병원비를 중심으로 국가가 전액 보장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건강은 국가 건강의 토대이다. 이명묵 대표는 “저소득층 가구의 어린이들은 비용 문제로 치료를 미루다 병을 키우는 일이 많다”며 “중산층 가정이라도 아이가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중증 질환에 걸리면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빈곤층으로 전락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상의료가 도덕적 해이를 유발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종명 팀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무상의료 시행 후 6세 미만 소아의 입원의료비가 1년 만에 39.2% 증가했다는 자료가 있지만 그건 도덕적 해이 때문이 아니라 산모 진료 비용으로 분류되던 신생아 진료비용이 소아 의료비에 포함되면서 생긴 착시현상”이라며 “실제 증가율은 11.62%여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건강보험 흑자를 다시 국민 건강 보장에 쓰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김 팀장은 “건강보험의 흑자 가운데 일부를 적립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어서 흑자재원을 보장성 확대에 사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건강보험 보장이 확대될 경우 큰 타격을 받을 보험사의 로비도 있지 않나 추측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2012년 민간의료보험 가입 현황을 보면 전체 가구의 80.4%가 하나 이상의 건강보험에 가입해 있고 가입 가구는 한 달 평균 34만 3,488원의 보험료를 내고 있다.
어린이 병원비 국가 보장은 정치권이 움직이지 않으면 민간의 노력만으론 해결이 불가능하다. 이명묵 대표는 “국가가 어린이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돼야 선거 때 이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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