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시세끼 중 한번은 밥 대신 빵”
식습관 변화로 프리미엄 건강빵 인기
비싼 값에도 시간 못 맞추면 매진
식빵은 딸기잼을 발라먹기 위한 한낱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한 덩어리에 5,000원이나 하는 가격표를 보고 분노할 수도 있다. ‘파리바게트나 뚜레쥬르에 가면 더 큰 사이즈를 2,200원에 살 수 있는데, 이렇게 배포가 커도 되는 것인가!’ 더군다나 시내 한복판의 힙 플레이스도 아니고 동네 골목길의 이름 없는 작은 빵집이다.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 망해요” 충고가 절로 나올 것 같은 동네빵집들은 그러나 뜻밖에도 성업 중이다.
전국 단위로 표준화된 프랜차이즈 빵맛에 질린 탓일까. 프리미엄과 건강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동네빵집들이 하나 둘 늘고 있다. 공장에서 배송돼 오는 냉동 생지(반죽)가 아니라 반죽부터 진열까지 전 공정을 동네 제빵사가 직접 손으로 하는 수제빵이다. 잼과 시럽의 도움 없이도 빵 자체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프리미엄 빵을 동네에서 먹을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은총. 가내수공업적 방식으로 그날 만들어 그날 파는 건강한 빵은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아예 못 살 정도로 인기다. 동네빵집이 마을에 선사하는 감각적 쾌락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침이면 골목길에 솔솔 피어 오르는 빵 굽는 냄새. 잃어버린 시간이라도 되찾을 듯 강렬한 추억의 매개다.

상도동 골목길에 프랑스 빵집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한 아파트단지 길목에 있는 프랑스식 빵집 벨르보. 외관부터 프랑스풍이 확연한 이곳은 생긴 지 이제 10개월이 된 신생 빵집이지만, 블로그에선 제법 유명한 맛집이다. 시내의 정통 베이커리에서나 맛볼 수 있던 세이글(호밀빵)이나 치아바타, 바게트처럼 담백하고 건강한 맛의 하드계열 빵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단팥빵이나 소보루빵 같은 단과자빵은 만들지 않는다. 몇 가지 종류를 제외하면 레시피에 아예 버터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당일생산 당일판매, 소품종 소량생산의 원칙에 따라 케이크도 휘핑크림을 올린 딸기 생크림 케이크 한 가지만 판매하지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다. 마롱세이글이 5,900원, 버터 프레첼이 4,000원, 카시스 타르트가 5,200원이니 프랜차이즈 빵과 비교하면 매우 비싼 편.

“유동인구가 없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로 이뤄지는 빵집이라 프랜차이즈 빵집처럼 싸고 다양한 빵을 구비해놓을 수가 없어요. 주로 30대 초반의 애기엄마들이나 노인 손님이 단골인데, 화학첨가제를 전혀 안 쓰고 생지까지 직접 만드니까 먹고 나서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편하다고들 하시죠.” 제빵 경력 11년째인 벨르보의 이준영 셰프는 ‘건강한 먹거리’라는 게 동네빵집 최고의 강점이라고 강조했다.
”보통 빵 반죽에 섞는 이스트는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효모인 데다 발효과정에서 생성되는 가스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돼요. 하지만 천연발효종인 샤워종은 과일이나 호밀, 밀가루에 물을 섞어놓으면 저절로 균이 생기면서 시큼하게 자연 발효가 되거든요. 이걸 빵에 넣으면 하드계열 빵은 풍미가 좋고 가스 생성도 덜 되니까 더부룩한 게 훨씬 덜 하죠.”
해외여행이나 유학 경험이 보편화하면서 빵 자체만으로 풍미가 좋은 빵을 먹을 줄 아는 입맛과 만들 줄 아는 솜씨가 생겨났고, 그것이 ‘프리미엄 동네빵집’이라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새로운 업종을 골목길에까지 진출시킨 원동력이 됐다. 삼시세끼 중 한 끼 정도는 빵으로 먹는 것이 일반화한 식문화의 변화도 한몫했다. 40대 직장인 오지훈씨는 퇴근길이면 다음날 아침식사용으로 동네빵집에 들러 블루베리 식빵과 초콜릿 식빵 등 세 덩어리의 식빵을 사간다. 식빵 세 덩어리에 1만5,000원 가까운 비용이 처음에는 비싸다고 생각했으나, 세 식구가 이틀간 맛나게 아침식사를 하는 대가로는 꽤 괜찮은 비용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아무리 배 고파도 프랜차이즈 식빵은 더 이상 못 먹겠다’고 해서 식구들이 한참 웃었어요. 한번 고급스러워진 입맛은 되돌리기가 힘들잖아요.” 오씨는 “부피는 작아도 촘촘하고 묵직한 질량 덕분에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점을 프리미엄 식빵의 장점으로 꼽았다. “건강한 식재료에 맛도 좋고요. 하루 세 번뿐인 끼니 중 한끼인데, 대충 때울 수만은 없잖아요.”

밥 대신 빵… 비싸도 건강해야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식빵 전문점 레체는 블루베리, 초코, 치즈, 밤, 호두, 크랜베리, 팥, 시나몬, 찰보리 등 다양한 재료를 섞은 식빵만 파는 빵집이다. 한식 조리사 강의를 다니던 주부 홍옥희(49)씨가 2년간 제빵을 배워 처음 오픈한 이 가게는 “앞으로 한 끼 정도는 밥 대신 빵을 먹는 문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상권이 좋은 대로변 대신 동네 한복판에 터를 잡았다. “좋은 재료를 써서 실속 있게 빵을 만들어야 하는데, 괜히 비싼 가겟세를 낼 필요가 있을까 싶었어요. 제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먹는 건 정직이 생명이더라고요. 기술은 자신 있었으니까요.”
상가 상인들이 ‘저 집 장사가 되겠냐’며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레체는 주택가의 엄마들 사이에서 빠르게 입소문이 났다. 영업 3개월 만에 인근에 또 다른 제과점이 들어설 정도였다. “동네 유치원 엄마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느 엄마가 ‘나 빵 찾으러 가야 되는데’ 하니까 다들 ‘어머, 레체 가세요?’ 하더래요. 우리 빵은 설탕을 안 쓰고 코코넛 팜 슈가를 써요. 밀가루도 유기농이고, 반죽도 하루 전날 만들어 숙성시킨 후 2차 반죽을 하죠. 이런 걸 손님들이 다 아시니까 비싸다고 타박하는 분은 없어요.” 쭉쭉 찢어지는 촉촉한 질감이 탁월한 밤식빵이 5,000원, 쫄깃한 식감의 크림치즈식빵이 5,500원이다.

프랑스산 버터ㆍ1등급 밀가루
맞춤형 식재료엔 어르신도 대만족
동네 주민들 입소문 단골도 늘어
프랑스에서 베이킹을 공부한 부부가 운영하는 방배동의 ‘재희스 파티세리’도 첨가제나 유화제를 넣지 않는 프리미엄 건강빵을 만드는 동네빵집이다. “사실 빵에는 들어가는 게 별로 없어요. 밀가루, 소금, 설탕이면 돼요. 거기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게 들어가는 게 문제죠.” 반죽이 제빵기술의 알파요 오메가이므로, 부드러움도 촉촉함도 모두 반죽으로 구현해야 하건만, 냉동 생지로는 첨가제의 도움 없이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식재료의 사용 역시 중요하다. 유기농이냐 아니냐는 철학의 차이이므로 차치해두더라도, 사용되는 재료의 차이가 빵의 맛과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 성북구 삼선교 부근의 샤뽀블랑은 100% 우유 생크림과 프랑스산 고메버터를 사용한다. 국산 무염버터와 달리 발효된 버터라 훨씬 더 풍미가 깊다. 모든 재료를 100% 유기농으로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으로 유기농 레이블은 붙이지 않는다. “밀가루만 유기농이 아니라 무화과나 우유도 유기농이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잖아요. 대신 마가린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100% 버터만 쓰죠. 밀가루도 2등급이 아닌 1등급만 쓰는 식으로 최고의 식재료를 사용해요.” 김득동 오너셰프는 “매일 찾아오는 단골들은 믿고 사가시는데 처음 오시는 분들은 가게 규모도 작고 하니까 의심스런 눈초리로 좀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며 “그런 분들이 다시 찾아올 때 기분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사가서 먹어보고는 괜찮았구나 싶어 다시 오시는 거니까요.”

동네빵집이 프랜차이즈로
개점 1년 만에 성북동 맛집으로 떠오른 오보록은 프랜차이즈 제과업체 본사에서 10년간 근무했던 왕명주 셰프가 건강한 빵을 직접 만들고 싶어 문을 연 가게다. 빵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돼 신물이 올라온다는 부모님을 위해 천연 발효종으로 만들었는데, 아무 거부반응 없이 잘 드시는 모습을 보고 발효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인근에 나폴레옹이라는 전설적 빵집이 있어서 큰 기대 없이 “소소하게 동네분들과 나눠먹어 보자”는 생각으로 열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유명해졌다.
“먹거리 유행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워낙 먹을 거리가 없어 딱딱하고 많이 씹어야 했던 그 시절의 식감을 그리워하는 것 아닐까요? 입에는 부드럽고 좋지만 몸에는 별로 안 좋은 음식들이 많잖아요. 부드러운 음식에 질린 분들이 많아진 것 같고, 빵이 주식이 되다 보니 건강한 빵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도 많아진 것 같아요.”

빵을 색다른 요깃거리에서 익숙한 주식으로 변모시킨 공로는 골목마다 들어선 프랜차이즈 빵집에 있다. 하지만 입맛은 변하고, 유행은 움직인다. 이제 동네빵집이 다시 반격에 나섰다. 되려 동네빵집이 프랜차이즈가 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2012년 테이블 하나 없는 압구정동의 동네빵집에서 시작해 전국 단위의 프랜차이즈가 된 프리미엄 건강빵집 롤링핀이 대표적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빵과는 다른 맛에 반한 동네손님들이 늘어나면서 동일한 매장을 내보고 싶다는 문의가 이어졌고, 제빵 경력 10년 이상의 전문가와 건강 정보에 해박한 의사가 의기투합해 법인을 설립, 전국 27곳에 매장을 두고 있다.
“일반 손님들이 많이 찾는 식빵은 사실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천연발효 효모를 이용해 소화를 원활히 돕고 빵 안에 견과류 등 슈퍼푸드를 재료로 섞어 디저트용이 아닌 식사대용으로 만들어 봤죠.” 롤링핀의 이성환 운영팀장은 “유럽 선진국에서 주로 먹는 하드계열의 빵이 더 건강하다는 인식이 있지만, 식빵처럼 부드러운 일본식 소프트빵이 여전히 많이 팔린다”며 “부드러운 식빵을 몸에 좋게 만든 것이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분법의 와해가 트렌드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립항이 상호 효력을 상실하고 있다. 건강과 맛, 집밥과 외식, 밥과 빵. ‘건강한 빵을 맛있게 집에서 사먹는다’는 이상한 문장이 바야흐로 조립 가능해진 시대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규희 인턴기자(성신여대 국문학 4년)
유해린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학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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