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 테이프 잔해는
끝없는 전쟁의 흔적
“이 골목 저 골목 전봇대건 벽이건 닥치는 대로 붙여 놓죠. 물량공세로 밀어붙이는데… 이 사람들 아주 악질입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을지로 4가에서 불법 광고물 정비작업을 하던 중구청 직원이 떼어 낸 벽보를 손에 쥔 채 말했다. 또 다른 직원은 “명동에서 떼고 신당동 갔다가 명동에 오면 또 붙어 있고 다시 신당동 가면 또 붙어 있다. 그야말로 끝없는 전쟁”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같은 시간 대학로의 한 골목길. 오토바이에 공연벽보를 싣고 나타난 남자가 능숙한 솜씨로 벽보를 담벼락에 붙이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공연벽보 30여장이 긴 벽면을 채우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광고물 부착 대행업자로 보이는 남자는 작업 결과를 휴대폰으로 촬영한 후 유유히 사라졌다.
유흥가나 사무실 밀집 지역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붙이는 자와 떼는 자의 ‘끝없는 전쟁’이 치열하다. 새로 문을 연 음식점을 비롯해 헬스클럽과 스포츠마사지 등 고객을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업체들은 눈에 잘 띄는 곳이라면 전봇대든 담벼락이든 심지어 휴지통까지도 가리지 않고 광고물을 붙인다. 그러나 대부분 허가받지 않은 불법 광고물이기 때문에 구청은 이를 제거한 후 업체에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최근 업체 간 손님 모시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불법 광고물이 덩달아 늘고 단속 건수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서울시에 따르면 2012년 1,330만건이었던 불법 벽보 및 전단 정비 건수는 지난해 2,050만건을 기록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불법 광고물을 단속하는 담당 직원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중구청 관계자는 “광고물정비팀 내 기동반 3명이 평일은 물론 심지어 주말까지 정비작업에 나서고 있는데 많을 땐 하루 200개 넘는 현수막을 철거한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단속에도 불구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 아파트분양업체의 경우 지난 6월부터 11월까지 반복적으로 불법 현수막을 게시해 8억 4,50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받기도 했다. 불법 현수막 1개당 과태료는 24만원 정도다.
적지 않은 제작비와 과태료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이 불법 광고물을 포기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탁월한 홍보효과다. 서울 종로의 한 헬스클럽 관리자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을 중심으로 2~3일에 한 번씩 벽보를 붙이는데 효과가 좋은 편” 이라며 “장당 과태료는 몇 만원 정도지만 그걸 보고 찾아온 손님은 적게는 몇 십만원, 많게는 몇 백만원짜리 프로그램을 구입한다. 그러니 과태료를 맞더라도 벽보를 붙이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 말했다. 올해 1월부터 최근까지 이 헬스클럽에는 불법 광고물과 관련해 총 2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
헬스클럽 관리자 “과태료 200만원 냈지만 되레 이득
홍보 그만두면 망할 수 밖에 없다”
구청 관계자 “단속ㆍ과태료만으론 해결 안 돼
업체들 스스로 자제해 주길 바랄 뿐”
한쪽에선 붙이고 다른 한쪽에선 떼어 내는 지독한 악순환을 끊을 방법은 없는 걸까. 아예 불법광고물을 붙이지 못하도록 불법부착물 부착방지판을 전봇대 등에 설치하고 있으나 테이프의 접착력이 강력하다 보니 부착 자체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이마저도 예산부족으로 필요한 만큼 설치할 수 없는 실정이다. 오히려 노후화된 부착방지판의 경우 파손이 심해 도시 경관을 해치는 부작용도 문제다. 합법적으로 현수막이나 벽보를 게시할 수 있는 시설도 운영하고 있지만 대부분 홍보효과가 미미한 위치에 있어 활용률은 높지 않다. 서울 중구 을지로의 한 헬스클럽 대표는 “합법적이면서 효과적인 홍보수단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홍보를 그만두면 손님이 오지 않을 게 뻔하고 결과적으로 우린 망할 수밖에 없다” 라며 당분간 불법 광고물 부착을 계속할 뜻을 밝혔다. 김종호 중구청 광고물정비팀장은 “단속과 과태료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만큼 담당자로서 많이 답답하다. 업체들 스스로 자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붙이는 자와 떼는 자 사이의 전쟁, 생존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 끝은 아직 멀어 보인다.
[하려는 자와 막는 자… 오죽하면 이런 방법까지]
#1 쇼핑카트
집 앞까지 밀고 가자
매장 앞 방지석 세워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 단지에 쇼핑카트가 세워져 있다(위 사진). 주민들이 인근 대형마트에서 장을 본 후 집 앞까지 밀고 온 것으로 보인다. 쇼핑카트 가격은 개당 10여만원 정도로 대형마트의 자산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4~5년 전까지 카트를 가져가는 고객들이 많아 매장 곳곳에 협조문을 붙여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회수해 오면 가져가고, 또 회수해 오면 가져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결국 마트 앞에 카트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촘촘하게 방지석을 설치한 후(아래)에야 카트 분실 건수가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지금도 가져갈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긴 하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2 편의점 앞 바구니
쓰레기 투척 몸살…
바구니 뒤집어 놓아
서울 시청역 구내 편의점 앞에 쌓여 있는 상품 운반용 플라스틱 상자가 뒤집힌 채로 쌓여 있다. 상자의 뚫린 쪽을 위로 향해 쌓는 것이 사용하기 편한 데도 불구하고 굳이 뒤집어 쌓은 이유는 뭘까. 상자 바로 위쪽에 붙은 안내문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똑바로 쌓아둔 상자에 행인들이 쓰레기를 버리자 ‘쓰레기통이 아니니 여기 버리지 말라’는 안내문을 붙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레기 투척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불편을 무릅쓰고 상자를 뒤집어 쌓은 다음부터는 출처 불명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크게 줄었다.
#3 자전거도로 진입방지 분리대
오토바이 통행 막으려
분리대 설치
서울 용산구의 자전거 도로와 일반 도로 사이에 분리대가 놓여 있다. 물리적인 차단수단이 동원된 점으로 미루어 자전거 도로면에 그려진 오토바이 통행금지 표시가 잘 지켜지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칫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는 분리대 설치로 오토바이 통행이 근절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또 한편으론 ‘오죽하면 이런 방법까지 동원했을까’싶다. 어쨌든 안심하긴 이르다. 언제 다시 오토바이가 자전거 도로를 질주할지 알 수 없으니. 또, 그 땐 어떤 수단이 동원될지 궁금하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최민영 인턴기자(숙명여대 법학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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