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 부지서 유물들 잇단 발굴
이전 사업 지연될 가능성 높아
서울삼성병원 등 대형병원 인접
“경쟁력 확보 어려울 것” 지적
잦은 원장 교체 등 인사 잡음에
“자구 노력 부족” 주위 시선도 싸늘
국립중앙의료원 출신 의사들은 의료원 역사를 1988년을 기점으로 나눈다. 1958년 설립 후 1988년까지 30년간은 이른바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 전국 각지에서 전문의 인재들이 몰려 들었고, 시설과 장비에서도 여타 병원들에 뒤짐이 없었다. “죽기 전에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소원”이라는 환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지금은 어떤가. ‘시설이 낙후돼 돈 없는 사람이나 가는 병원’ ‘응급환자도, 의료급여환자도 꺼리는 병원’ ‘밤에는 길이 막혀 택시기사들도 가지 않으려는 병원’…. 현재 국립중앙의료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들이다.
국가 중추 의료기관의 소임을 띤 국립중앙의료원이 벌써 수년째 표류 중이다. 의료원 이전 사업 연기, 잦은 의료원장 교체로 인한 사기 저하에다가 인사 잡음 등 내부 문제가 겹치면서다.
국립중앙의료원 측은 국가중앙병원의 위상을 회복하고 공공보건의료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서울 서초구 원지동으로 이전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와 같은 신종 감염병은 물론 테러, 재해 등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려면 시설ㆍ장비 현대화와 더불어 건물 구조변경 등 시설개선이 힘든 현 서울 중구 을지로 부지를 매각하고 의료원을 이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원실 내 화장실도 없는 시설서 경쟁력 확보 무리
정부의 ‘신종감염병 대응을 위한 국가방역체계 개편방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립중앙의료원을 150병상 규모의 ‘중앙감염병전문병원’으로 지정할 계획이다. 또 정부는 재해 및 테러 등 국가재난사태 대처를 위해 국립중앙의료원에 중증외상센터도 신축할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이 이전이 현실화 돼야 가능하다. 권용진 국립중앙의료원 기획조정실장은 “메르스 사태 당시 본관에 음압시설을 설치하려 했지만 리모델링 자체가 불가능해 포기했었다”면서 “음압시설이 딸린 응급실을 갖추기 위한 공사를 지난 10월 중순 시작했다”고 말했다. 권 실장은 “시설 노후화로 인한 의료원 이미지 훼손은 물론 환자만족도도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립중앙의료원 본관건물의 경우 5인실 이상 다인실 내부에는 화장실마저 없다. 진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술실도 30년 만에 공사를 했다. 국립중앙의료원 관계자는 “우리가 신관이라 부르는 연구동도 38년이나 된 건물”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국립중앙의료원의 원지동 이전은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 2002년 이전 예정부지에서 고인돌과 석기 등이 발견돼 발굴조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재 시굴조사 결과 보존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될 경우 병원을 지을 수 없게 된다. 최악의 경우 의료원 이전 및 현대화사업은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1989년 서울아산병원 개원을 필두로 대학병원들이 대형화, 첨단화 하면서 경쟁력을 잃은 국립중앙의료원의 26년 만의 부활 시도가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원지동으로 이전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
여기서 따져봐야 할 대목도 있다. 국립중앙의료원 측 주장대로 의료원을 원지동으로 이전하면 과연 부활이 가능할까.
의료계 일각에서는 국립중앙의료원이 원지동으로 이전해도 경쟁력 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삼성병원 강남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 서울아산병원 분당서울대병원 등 대형 병원들이 터 잡고 있어 이전 해도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다. 국립중앙의료원 출신의 한 전문의는 “현재 의료원이 서울대병원 강북삼성병원 순천향대서울병원 인제대서울백병원들에 포위된 것처럼 강남에서도 대형 병원들에 포위될 것이 뻔하다”면서 “현재 의료원 수준으로는 이전을 해도 경영정상화가 힘들 것”이라고 했다.
지역적 정서도 걸림돌이다. 의료전문가들은 “일반진료보다는 공공의료에 치중한다 해도 의료원 회생을 위해서는 지역 환자유치가 필요한데 질 높은 의료서비스에 익숙한 강남지역 환자들이 국립중앙의료원을 선호할 리 만무하다”라고 말한다.
이전 시 들어설 중증외상센터도 경쟁력 확보가 쉽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국립중앙의료원 출신 전문의는 “을지로 현 부지보다는 시설이나 인력이 충원되겠지만 강남과 수원 등 경기도 일대 대형병원들이 외상응급센터를 구축하고 있어 국립중앙의료원이 강남으로 이전을 해도 환자 수요가 크지 않을 수 있다”면서 “국군수도병원마저 민간인 외상환자들을 수용하겠다며 민간의료진을 수급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 전문의는 “대형병원들이 촘촘히 들어 선 수도권에서 탈피해 중부권으로 진출, 전국단위 환자를 보면서 공공의료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의료원 측은 “현재 상황에서 의료원이 독자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신종 감염병, 화상, 재해 등 민간의료기관이 기피하는 공공의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또 “민간 대형병원들과 경쟁은 아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면서 “정부에서도 독자생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공공의료라는 의료원만의 고유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지동으로 이전을 해도 경쟁력 구축이 어려운 만큼 공공의료 기능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차원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국립중앙의료원 원지동 신축이전(현대화사업)개요>
자료: 남인순 의원실(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자구노력 미흡” vs “잦은 수장 교체 탓”
공공의료 활성화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국립중앙의료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국립중앙의료원이 경쟁력 제고는 물론 만성적자 해결을 위한 자체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최동익 의원실은 “이전계획에 차질이 빚어져 일이 꼬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2010년 법인화 이후에도 만성적자와 관련해 명확한 분석 없이 국민건강증진기금이 예산으로 투입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2010년 법인화 후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민건강증진기금을 통해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이 국회 승인을 통해 받은 올 운영예산은 204억6,100만원이다. 내년 운영예산은 260억8,900만원으로 편성됐다. 여기에다 현대화추진사업 예산으로 올 235억9,600만원이 책정됐지만 국회에서는 원지동 부지에 문화재 유물이 발견돼 현대화사업이 기존계획대로 추진되기 어렵다고 판단, 지원액을 절반 선(140억5,500만원)으로 삭감했다.
이와 관련 국립중앙의료원은 “만성적자 해결 등에 자구노력이 미흡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면서 “현재 경영혁신계획을 마련 중으로, 내년부터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경영혁신 등 자구노력이 부족한 결정적 이유로 잦은 수장교체를 지적한다. 권용진 기획조정실장은 “전 의료원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등 내부문제로 인해 지속적인 개혁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서 “잦은 수장 교체로 내부 구성원들의 피로감이 증가해 개혁과 관련된 동기유발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권 기획조정실장은 “그나마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구성원들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친동생 운전기사 채용… 비서관 출신도 입사
한편, 국립중앙의료원 경영진의 인사문제가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내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에서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지만, 현 안명옥 의료원장이 취임한 후 전체 의료진의 10%에 이르는 각과 전문의 12명이 퇴직했다. 이들 퇴직자들의 진료 분야는 외과 산부인과 신경과 응급의학과 영상의학과 정형외과 안과 성형외과 등 다양하다. 30년 넘는 장기 재직자들도 포함됐다. 후임들이 자리를 메웠지만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진료체계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국립중앙의료원의 한 전문의는 “타 대학병원에 자리가 나면 이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의료원장 측근이 대거 채용된 인사도 구설에 올랐다. 의료원장 비서실장과 기획예산팀장이 안명옥 의료원장이 17대 국회의원 시 비서관 출신이다. 국립중앙의료원 측은 “비서실장의 경우 계약직으로 의료원장 임기가 끝나면 계약이 해지될 것”이라면서 “기획예산팀장도 비서관 출신이 맞지만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채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또 의료원장 운전기사는 의료원장 친동생이다. 국립중앙의료원은 “운전기사는 의료원 소속이 아닌 용역회사 직원 신분으로 의료원장이 차로 이동 시 정보보호가 필요해 친동생을 고용한 것”이라면서 “정치인들이 친인척을 고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보건복지부 공공의료과 관계자는 “국립중앙의료원 인사는 원칙적으로 공채지만 특채도 가능하다”면서 “비서관 친동생 출신이 채용된 것은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인사채용과 관련 문제가 있다면 보건복지부가 국립중앙의료원을 관리감독하고 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