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처음 방문하면 서울 광화문광장처럼 가보는 곳이 있다. 가이드 안내에 따라 링컨기념관 계단에 올라 반대편 워싱턴기념탑을 바라보며 기념사진 한 컷을 찍었다. 계단을 내려와 이동하는 오른편 길 한 켠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는 기념비와 조각상, 그리고 바닥에 새겨진 그 유명한 문구가 있었다. “알지도 못하던 나라와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국가의 부름에 나섰던 이들을 기리며.”
한국전쟁 참전 미군 전사자는 3만 6,000여명에 이른다. 미국의 이해에 따른 파병이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보도 듣도 못한 나라’를 지키겠다며 군인들이 흘린 피는 그 자체로 65년 한미관계를 좌우하는 역사가 됐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중국이 부상하면서 한미관계가 미묘해졌다. 중국을 견제하느라 조급해진 미국이 한국에 조금 더 명확한 ‘베팅’을 요구하는 양상 때문이다. 친미 일변도에서 당당한 한미관계로 바꾸자는 국내 여론이 부상한 탓에 무조건 미국 편만 들 수 없던 한국 정부는 미중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최근 미 하와이대 동서센터, 한국언론진흥재단 주관으로 미국을 다녀왔다. 전ㆍ현직 미국 당국자와 미국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싱크탱크 전문가의 얘기를 들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도 미국의 다급함이었다.
“미국이 왜 한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일을 한다고 생각하나.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는 미사일 조기 식별ㆍ대응이 가능한 탁월한 시스템이다. 엄청난 비용이라는 건 동의한다. (하지만) 안보가 중요하다면 고비용도 감수해야 하지 않은가.” 미 국방대학교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사드 관련 한국 정부의 불명확한 입장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중국과의 남중국해 갈등을 두고도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국가이익에 항해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부합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 (남중국해) 문제에 관해 지금보다 더 힘 있는 목소리로 조목조목 (중국에 대해) 지적해야 한다”는 주문을 쏟아냈다.
한국은 빠지고 미국 일본 등 12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해선 “한국이 협상 초기 단계부터 참여하지 않은 건 실수”(마커스 놀랜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라는 지적도 나왔다. 부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 부소장은 “한미 간에는 대 중국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친한파 전문가들을 만나지 못한 탓도 있겠다. 지일파로 알려진 일부 전문가 발언이 현재 미국 행정부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워싱턴의 주류 아시아통들은 하나같이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재균형(rebalancing) 정책을 기반으로 한반도 상황을 바라보는 게 분명했다. 놀라운 건 이번에 접촉한 미국 측 인사 중 일부는 ‘일본을 옹호해 그 힘을 중국 견제에 사용하겠다, 그러니 한국은 역사 따지지 말고 한미일 동맹 구축에 협조해야 한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미국에 맞서 안하무인 힘의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후 신자유주의 워싱턴 컨센서스가 무너지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전 폐해 때문에 새로운 G2(주요 2개국) 시대가 열렸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오만함도 여전하다. 그렇다고 이 둘 사이에 끼인 한국 입장이 과연 ‘축복 받는 러브콜’인가. 한국 외교는 이를 슬기롭게 풀어갈 역량이 되는가. 요동치는 한반도와 국제 정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 재평가와 구시대 복원에 사로잡혀 갈등만 재생산하는 박근혜 대통령. 그는 급박한 미국 조야의 사정을 적절히 보고 받고도 그렇게 국내 정치 득실만 따지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정상원 정치부기자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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