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번성을 설명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 특유의 병역제도다. 로마 초기 지중해 패권을 놓고 격돌한 카르타고만 해도 용병을 주력으로 한 군대를 유지했지만 로마는 달랐다.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군대의 일원이 되는 것을 당연시했으며 병역은 고귀한 의무이자 신성한 특권이었다.
로마군의 힘은 주축인 시민병과 함께 귀족층에서 나왔다. 건국 초창기부터 봉사와 기부ㆍ헌납을 통해 공익에 이바지했던 귀족들은 전란이 발발할 때마다 앞장서 참여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이런 점에서 로마의 귀족들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자진해 이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충실히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한 귀족들의 솔선수범은 이후 오랫동안 로마의 버팀목이 됐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 지도층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병역 문제에 관한 한 로마 귀족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병역을 면제 받은 일부 고위층 자제들의 경우가 단적인 예다. 국적을 포기하고 병역 면제를 받는 것이 위법은 아니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병역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국적마저 버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묵묵히 군복무를 마친 젊은이들과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로서는 실망감을 넘어 박탈감을 느낄 만한 일이다.
과거 수 차례 이어진 병역 비리로 사회 지도층과 그 자제들의 병역 이행 여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매우 높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공직을 이용해 부정하게 병역을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직자 등의 병역 사항 신고 및 공개에 관한 법률을 시행해오고 있다. 누구든지 관보와 병무청 홈페이지를 통해 고위 공직자와 그 아들의 병역 이행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999년 병역사항이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해도 고위 공직자 등의 병역 이행률은 85.9%(본인 82.2%, 직계비속 89.5%)에 그쳤지만 지난해 말 92.1%(본인 89.6%, 직계비속 95.6%)로 높아졌다.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했겠지만 높아진 국민적 관심 속에 병역 사항 공개 제도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관련 법 제도 시행 이후 정당하게 병역을 이행하지 않으면 더 이상 지도층이 되기 힘들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바람직한 변화의 흐름은 다른 곳에서도 읽힌다. 편법으로 병역을 면제 받는 사람과 달리 외국 영주권을 갖고 있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진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외국 영주권자 신분으로 자원 입대한 사람은 2011년 200명에서 지난해 436명으로 3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 올해만 해도 지난 7월까지 이미 316명에 달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우리 사회는 고위 공직자 등 사회 지도층에 대해 높은 수준의 도덕 의식과 의무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일부 지도층 자제의 국적 이탈과 국적 상실 등은 여전히 사회적 지탄과 공분의 대상이다.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해 다시 국적을 회복할 수 없게 하거나 국적 변경 후 일정 연령까지 취업비자 발급 제한, 상속세와 증여세 중과세 등 확실하게 불이익을 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또한 1급 이상 고위 공직자 등에 대한 병역 사항을 집중 관리하는 안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행해야 하는 병역 의무에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 지도층으로 국가에 봉사하려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성실하게 병역을 이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로마의 번영을 이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병역 문화가 지도층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창명 병무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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