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법의 최전선에 서다
국가권력 불신하던 로펌 변호사
남부 흑인들의 용기에 사로잡혀
시민운동 소송 주도, 투사의 길로
인권의 사각, 감옥을 보다
‘국가감옥 프로젝트’만들어
재소자 인권ㆍ수형제도 개선 온힘
국제사회 기념비적 판례 개척
감옥 없는 사회를 꿈꾸다
감옥산업 복합체 악순환 성토
범죄자 재활은 좋은 감옥 아닌
지역 공동체서 효과적이라 주장
“압제(Tyranny)는 힘센 자가 아니라 가장 힘 없는 이들부터 짓밟고 시작됩니다.”
변호사 앨빈 브론스타인(Alvin Bronstein)에게 가장 약자는, 남부의 흑인도 이주노동자도 도시 빈민도 아닌 옥에 갇힌 이들이었다. 아니 사실 그들이 그들이었다. 다만 거기서도 떨려난 이들. 그는 1972년 미국시민자유연대(ACLU)의 ‘국가 감옥 프로젝트(National Prison Project)’를 만들어 23년간 이끌며, 재소자 인권과 수형제도 개선을 위해 헌신했다. 은퇴 직전인 95년 3월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인터뷰에서 그는 저렇게, 또 이렇게 말했다. “내 등을 떠민 건 과도한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권리장전(Bill of Right)의 정신이죠.(…) 인권을 의미 있게 여기는 사회라면 재소자에게도 사회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보장해야 합니다.”
인권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단에 등을 대고 인간의 존엄과 문명의 기품이 아주 나락으로 구르지는 않게 떠받친 앨빈 브론스타인이 10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브론스타인은 1928년 6월 8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러시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약품 판매원이었고, 어머니는 가게 점원이었다. 가난했겠지만, 가난보다 더 사무친 유년의 기억은 아버지가 들려주곤 하던 코사크의 유대인 학살 이야기였다고 한다. 2차 대전 나치의 만행을 알게 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런 분노는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고, 권력에 대한 불신이 거기서 비롯됐노라고, 그는 여러 차례 말했다. 브루클린 에라스무스홀 고교를 졸업한 뒤 뉴욕 시티칼리지와 뉴욕 로스쿨을 거쳐 51년 변호사가 된 그의 첫 직장은 친척이 운영하던 법률사무소였다. 하지만 사업가들의 소송을 대행하며 세법과 상법을 뒤적이는 일이 그의 성에 찼을 리 없다.
선거와 공공장소 흑백 차별을 금하는 민권법(Civil Right Act)이 발효된 1964년 6월, 36세의 그는 로펌에 사표를 내고 미시시피 주 아프리칸 아메리칸(흑인)들의 유권자 등록을 독려하는 ACLU의 ‘자유의 여름(Freedom Summer)’캠페인에 가담한다. 그리고 만 4년간 ACLU 미시시피 주 법률 자문위원회 수석 변호사로서 딥 사우스(미시시피, 앨라배마, 루이지애나 등)의 인권 소송을 주도하며 단체와 활동가들을 대변했다. 그 경험을 그는 “내 생의 전기였다”고, “이제 전에 하던 변호사 업무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훗날 말했다. 그를 사로잡은 건 남부 흑인들의 용기였고, 갓 탄생한 법(민권법)의 최전선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었다.
감옥 실정을 보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인종차별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개선의 노둣돌이 놓였다지만, 감옥은 그조차 상상하지 못하던 참경의 공간이었다. 구타와 모욕은 일상이었고, 변기 위의 쪽잠도 예사였다. 법도, 사회의 시선도 미치지 않는 인권의 사각. 그는 당시 인권운동가들이 감옥으로 눈을 돌린 건 논리적 귀결이었다고 95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미국 교정행정 역사상 최악의 사태로 꼽히는 ‘아티카(Attica) 감옥 폭동’은 1971년 9월 일어났다. 뉴욕 주 버팔로 시 와이오밍 카운티의 중죄인교도소 아티카의 재소자 1,200여명이 교도관 40여 명을 인질로 잡고 나흘 간 교도소를 점거한 사건. 재소자들은 28개 요구조건을 걸고 주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다. 한 달에 한 개씩 지급되는 두루마리 휴지를 늘려달라, 주 1회 샤워를 허락하라, 종교 자유를 보장하라…. 협상 타결 뒤 기소도 보복도 하지 말라는 것도 물론 포함됐다. 사실 저 요구 대부분은 ‘폭동’전부터 끊임없이 제기해온 거였다. 하루 30센트의 강제노역 임금으로는 휴지 등 사용품(私用品)을 사 쓰기에도 부족했고, 정원보다 40%나 많이 수용된 감방에서는 제대로 누울 수도 없었다. 거기에 교도관의 구타와 임의적인 징벌방(독방) 감금, 다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현실…. 그 끝이 폭동이었다.
당시 주지사는 석유왕 존 록펠러의 손자인 보수주의자 넬슨 록펠러였고, 재소자 80%는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출신이었다. 점거 나흘째인 13일 록펠러는 무력 진압을 명령한다. 훗날 한 조사위원이 “인디언 대학살을 빼면 남북전쟁 이래 최악의 유혈참사”라고 표현한 그 진압 작전으로 43명이 숨졌고 89명이 다쳤다. 사망자 중에는 교도관 8명과 민간인 직원 3명이 포함됐는데, 재소자 폭행으로 숨진 교도관 1명을 뺀 전원이 주 방위군의 총격에 희생됐다. 72년 미연방조사특별위원회는 ‘과잉진압’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했지만, 책임자를 적시하지는 않았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무더운 날 오후(Dog Day Afternoon)’는 폭동 4년 뒤인 75년 개봉됐다. 영화에는 어설픈 은행강도 ‘소니’역을 맡은 알 파치노가 경찰과 협상 도중 “아티카, 아티카”를 절규하듯 연호하는 장면, 시민들이 동조 환성을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그들은 ‘폭동’을 봉기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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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는 3년 뒤 포드 행정부의 부통령이 됐다. 아티카의 유족과 부상자 가족은 74년 뉴욕 주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뉴욕 주정부는 2000년에야 배상액 800만 달러에 합의했다.
브론스타인이 ‘국가 감옥 프로젝트(NPP)’를 설립한 것은 아티카 폭동 이듬해인 72년이었다. NPP는 이후 연방과 주정부를 상대로 수많은 집단 소송을 벌이며 재소자 인권 보호 및 법률ㆍ제도 개선 운동의 선봉으로 활약했고, 미국뿐 아니라 국제 사회의 유사 소송의 기준이 될 만한 기념비적인 판례들을 개척했다.
출범 직후 앨라배마 주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76년 연방법원의 수감시설 최소기준 설정 판결로 이어졌다. 당시 앨라배마의 감옥은 창문도 없어 ‘개집(Doghouse)’이라 불렸는데, 3명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에 7명이 수감돼 일부는 변기 위에서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77년 로드아일랜드 집단소송은 수감시설 위생 및 보건 실태와 교도관들의 폭력을 문제 삼은 거였다. 연방법원은 수정헌법 8조의 ‘잔인하고 이례적인 형벌(cruel and unusyal punishment)’금지 조항 위반이라며, 시정되지 않을 경우 주립교도소를 폐쇄하겠다고 판결했다. 79년에는 엉터리 치료로 전신이 마비된 한 재소자를 대리해 버지니아 주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미국 교도소 재소자 배상금으로는 사상 최고액인 51만8,000달러를 받아냈고, 92년에는 재소자가 다른 재소자로부터 심각한 상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을 교도관이 인지하고도 그를 보호하는 데 실패한 경우, 교도관에게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는 1989년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수형자 인권운동 국제NGO ‘국제형벌개혁ㆍPRI Penal Reform International’의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브론스타인이 궁극적으로 원한 건 감옥 환경 개선이 아니라 감옥이 최소화하는 사회, 감옥 없는 사회였다. 그는 범죄자의 재활은 감옥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 안에서, 가족과의 유대 속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했고, PRI 등과 더불어 마약소지 등 경범죄자를 실형 대신 치료ㆍ감호로 대체토록 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지난 4월 아일랜드가 마약소지자를 기소-재판하지 않고 치료시설에 수용해 재활을 돕기로 한 것, 앞서 2001년 포르투갈이, 2009년 멕시코가, 또 스위스와 독일 콜롬비아 페루 싱가포르 홍콩 등 여러 나라가 마약 소지를 ‘비범죄화(decriminalize)’했거나 하려는 것도 브론스타인 등이 이끌어낸 변화의 일부였다.(thinkprogress.org, 2015.11.4)
국제수형시설연구센터(ICPS)가 2013년 10월 발표한 ‘세계 재소자 현황’에 따르면, 전 세계의 재소자(미결수 제외)는 약 1,020만 명이다. 그 가운데 약 22%가 미국(224만 명)의 감옥에 있다. 인구 10만 명 당 716명 꼴로, 세계 평균(144명)의 5배였다.
브론스타인은 ‘감옥산업 복합체’ 즉 민간자본이 감옥을 지어 운영함으로써 정부는 재정 지출을 줄이고 자본은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 재소자는 적절한 직업교육으로 재활에 도움을 얻는다는, 그럴싸한 논리의 허구성을 성토하곤 했다. 재소자 노동이란 게 대부분 기계적 단순노동이고, 이윤 목적의 자본이 수형 환경 개선에 적극적일 리 없고, 무엇보다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경 행형정책을 지지하게 되고, 그 결과 감옥은 더욱 과밀화하고 인권이 악화하는 악순환을 그는 누구보다 고통스럽게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레이건 행정부의 ‘마약과의 전쟁’이후 조지 H.W.부시의 보수정권 8년을 겪은 뒤인 95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의 감옥을 20세기의 감옥처럼 만들어놓은 모든 진보의 결실들이 점점 침식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티카 폭동 40주년 한 달 전인 2011년 8월 9일, 재소자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 당시 29세)가 교도관 3명의 집단 구타로 병원에 실려왔다. “입 닥쳐(Shut the F~ up)”라는 한 교도관의 호통에 누군가가 “너나 입 닥쳐”라며 욕을 했는데, 방에서 TV 보던 윌리엄스의 목소리로 오인한 결과였다. 교도관들은 재소자 전원을 감방에 감금한 뒤 윌리엄스를 끌고 나와 다수가 보는 앞에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보석상을 턴 혐의로 4년형을 받은 윌리엄스는 당시 형기를 넉 달 남겨둔 상태였다.) 교도소 당직 의사는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윌리엄스는 50마일이나 떨어진 버팔로 시내의 에리 카운티 메디컬센터로 옮겨졌다. 어깨 골절, 두 다리 골절, 다수의 갈비뼈 골절, 왼쪽 눈 주위 뼈 골절, 상악동 출혈, 다수의 자상과 전신 타박상. 의사의 소신으로 교도관 폭행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고, 주 정부와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아티카의 교도관들은 그 조사에 항의하며 ‘폭동’ 기념일을 기점으로 태업에 나섰고, 그 피해는 또 오롯이 재소자들의 몫이었다. 배식 지연, 면회절차 지연, 과잉 수색….
교도관들은 조사에 철저히 저항했고, 재소자들 역시 보복이 두려워 진술을 기피했다. 조사관들은 진술에 응한 재소자 5명을 다른 교도소로 이감시켜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확인한 바, 교도소 측이 폭행도 모자라 사실 은폐를 시도했고, 윌리엄스가 흉기를 소지한 것으로 보고서를 조작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 해 12월 13일 관련 교도관들은 ‘1급 폭행’혐의 등으로 정식 기소됐다. 성폭행 외에 교도관이 재소자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로 기소된 것은 뉴욕 주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NYT, 2015.2.28)
‘마셜프로젝트(범죄정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보도하는 비영리 뉴스그룹)’의 톰 로빈스(Tom Robbins)는 지난 2월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수정헌법 8조’ 위반에 해당하는 교도관 폭행은 다반사라는 게 아티카 수감자와 출소자 다수의 진술이었다며, 한 재소자가 했다는 말- “바깥 사람들이 여기를 변화시킬 수는 없어요. 우리가 (새로운) 폭동을 일으켜야 해요. 그것만이 유일한 해법입니다”-을 전했다. 기자는 그 어조가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절망적이었다고 덧붙였다. 재소자의 저 말은, 비록 어조는 달랐겠지만, 아티카 폭동 조사위원회 책임자였던 아서 리먼(Authur L. Liman)의 말과 같은 말이었다. “아무리 굳은 대문과 담장이라도 절망한 이들의 분노를 영원히 가두지는 못한다.”(워싱턴포스트, 2012.7.19) 그리고 진보매체 ‘The Nation’이 1971년 9월 27일자 사설 ‘아티카 학살 Slaughter at Atica’에서 경고한 말이기도 했다. “미국의 감옥은 법적 기관(institutions)이 아니라 (쓰레기 등을 담는) 용기(容器 receptacles)였다. 당연히 죄수는 쓰레기가 아니다. 감옥이 현재의 자유뿐 아니라 미래의 희망마저 박탈하려 한다면 우리는 ‘아티카’를 새로운 전쟁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강성준씨는 2007년 민주노총이 주최한 비정규직노동자 대량해고 규탄집회에 참가했다가 업무방해 등 혐의로 약식기소돼 2012년 6월 대법원에서 벌금 70만원 판결을 받았다. 그는 벌금 납부를 거부하고 그 해 12월 7일 노역수형자로 서울구치소에 13일간 수감됐다. 그리고 당시 구치소 거실 면적이 표지판 기록(8.96㎡ㆍ정원 6명)과 달리 6.687㎡(싱크대 등 포함하면 7.419㎡)이고 정원에 따르더라도 1인당 1.24㎡(약 0.375평)에 불과하다며, 2013년 3월 과밀 수용에 대한 헌법 소원을 냈다. 소장에는 브론스타인의 NPP와 PRI 등이 쟁취한 미국과 독일의 수용시설 환경 기준과 최소면적 등이 국제 판례로 명시됐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지난 11월 6일 본위원회 115차 회기 한국 보고서에 대한 최종 권고에서 기업 인권, 성차별, 성폭력, 군대 폭력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지적과 함께 ‘구금시설’상황에 대한 우려도 표명했다. 유엔인권위는 과밀수용ㆍ외부 의료시설 접근 제한, 징벌 목적의 보호장비 임의 사용, 독방 구금 남용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브론스타인의 책상 위에는 그가 앞장서 헐게 한,‘던전(dungeonㆍ지하감옥)이라 불리던 1890년대 테네시 주립교도소의 벽돌 한 장과 하와이 청소년교도소 징벌방 열쇠의 명판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명판에는 “이 열쇠가 청년을 절망 속에 가두는데 또 다시 쓰이지 않기를(Never Again will this key be used to lock a youth into hopelessness)”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에게 저 문장의 ‘청년’은 늘 ‘인간’이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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