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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탈 로넬 국내 첫 번역서...완전한 앎이 있다고?

입력
2015.11.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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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

아비탈 로넬 지음ㆍ강우성 옮김

문학동네 발행ㆍ544쪽ㆍ3만원

아비탈 로넬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슬라보예 지젝, 주디스 버틀러, 장 뤽 낭시에 버금가는 철학자다. 그는 루스 이리가레이, 줄리아 크리스테바, 엘렌 식수와 나란히 하는 열정적인 페미니스트다. 폴 드만, 자크 데리다를 공부한 해체론자다. 또한 전형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고급한’ 문학예술에서부터 ‘저급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는 전방위 문화게릴라이다.

“FBI, 마약과 전쟁을 벌여 마약 밀매 조직을 일망타진하다.” 이와 같은 신문 머리기사를 접하면서 “어리석긴. 마약 없이는 문화도 없거든”하고 조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대한 마약조직의 두목일까? 그가 다름 아닌 아비탈 로넬이다. ‘마약전쟁: 문학, 중독, 조증’에서 그는 창조적 상상력을 단속하고 규제하면서 뉴라이트로 퇴행하고 있는 미국 문화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가한다.

파격과 유희의 철학자, 아비탈 로넬. 문학동네 제공
파격과 유희의 철학자, 아비탈 로넬. 문학동네 제공

‘어리석음’은 로넬의 대표작이다. 로넬은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한국에서 번역 출간되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원서는 2002년 나왔다.

다중지성을 강조하는 똑똑한 정보화시대에 로넬은 하필이면 ‘어리석음(Stupidity)’을 철학적 관심사로 삼았을까? 그가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무엇보다 로넬은 ‘어리석음’을 무기로 확실성의 토대를 해체하고자 한다. 서구철학에서 코기토적 주체는 세계를 ‘남김없이’ 파악할 수 있는 인식의 토대로 간주되었다. 그와 같은 주체에게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는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몰라야 가능해진다.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 그것이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어리석음이다.

플랑드르 화가 크벤틴 마시스(1466-1530)가 1510년경 그린 '바보의 알레고리’. 이마에 돋아난 종기는 무능함을 상징하고, 입술에 댄 손가락은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닭대가리는 바보를 뜻한다. 위키피디어
플랑드르 화가 크벤틴 마시스(1466-1530)가 1510년경 그린 '바보의 알레고리’. 이마에 돋아난 종기는 무능함을 상징하고, 입술에 댄 손가락은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닭대가리는 바보를 뜻한다. 위키피디어

그러므로 로넬이 말하는 어리석음은 단순히 게으른 철학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철학의 초월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칸트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철학은 상상력에 바탕한 글쓰기를 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철학적 개념이 언어로 구성되는 한 상상력에 바탕한 은유의 남용은 막을 수 없다. 은유의 어원에는 이동하고 여행하고 움직인다는 뜻이 들어 있다. 아무리 명확하고 확실한 개념경제에 도달하려고 해도 철학은 은유의 이동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앎이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불멸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철학의 꿈은 거짓말에 능한 문학적 기획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다지 다를 바 없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맥베스의 독백을 비틀어본다면 철학 또한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이고, “무의미한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헛소리”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철학의 어리석음을 해체하려고 달려드는 해체론자들(니체, 데리다 등)이야말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농담으로 즐길 줄 아는, 어리석음의 대가들인 셈이다.

여기에 덧붙여 보편적 진리를 내세웠던 서구철학은 어둠을 비추는 태양이 되기 위해 천재를 남성에게, 백치의 순진무구한 어리석음을 여성에게 배치해왔다. 어리석음을 여성에게 배치함으로써 ‘안다고 가정된’ 주체를 발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구철학은 남근경제에 바탕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보편적 진리임을 주장한 이성중심철학이 사실은 젠더 기획에 따른 편파적인 철학에 불과해진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여성적인 철학(혹은 여성적인 글쓰기)은 폭력적인 남근경제와는 얼마나 다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해체주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로넬은 명확한 젠더 이분법에 따라 사유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로넬이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타자의 목소리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다. 로넬은 전화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목소리와 접속하는 운송양식을 여성적인 것과 연결시킨다. 무에서 유(창조물로서 아이)를 운반하는 여성의 몸은 태초부터 유혹적인 원거리 운송 수단이다. ‘받아쓰기: 신들린 글쓰기’에서 주장하다시피, 작가는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전화교환원이다. 작가는 어딘가에서 걸려오는 부름과 접속하여 그것을 받아 적는 샤먼이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유령의 귀환이자 애도의 풍경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얇고, 넓게, 빨리, 소비하여 ‘쓰레기’로 만든다. 아무리 난해한 이론이라도 단순 명쾌하게 정리되고 소모된다. 로넬의 글쓰기는 그 산만함과 난해함으로 인해 신속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잊어버리려는 욕망에 저항한다. 그런 글쓰기는 복잡한 사태를 단순 명료한 확신으로 대체해버리는 어리석은 전략을 검토하고 재검토하면서 적대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그런 측면이야말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이며, 그의 텍스트가 번역되어야 할 이유다. 어떤 이론이든 소비 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한국사회지만, 그래도 로넬의 텍스트는 앞으로 상당 기간 읽히고 논의될 것처럼 보인다.

임옥희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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