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도쿄 신주쿠 일대에서 ‘배외(排外)주의’와 ‘헤이트(hate)스피치’에 반대하는 도쿄대행진이 열렸다. 주최 측은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가르고 증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인종차별주의는 일본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며 평화와 공존을 위해 시민이 나서자고 촉구했다.
재일한국인/조선인은 물론 전후 새롭게 일본에 이주한 뉴커머,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성적소수자, 장애자, 빈곤층 등을 대변하는 단체와 많은 시민이 모였다. 이들은 차별에 반대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피켓, 티셔츠, 보디페인팅 등의 다양한 표현과 빅뱅 등 인기 있는 젊은 가수의 노래와 랩에 맞춰 구호를 외쳤다.
이 가운데 ‘배외주의와 헤이트 스피치에 가담하지 않는 출판 관계자 모임’이 특별히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이들은 이번 대행진의 후원자로 참가를 하고 ‘반차별 선서(選書) 목록 20권’를 발표하기도 했다.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특정 행사와 관련된 책 목록을 발표하는 건 뭐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어느 국가나 사회든 소수자는 살기 어렵고 역사문제는 충돌이 따르기 때문에 좀 과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본 출판인들의 이런 행동은 출판인들이 단순히 책을 만들어 파는 집단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그들은 책을 만듦과 동시에 그 책으로 정의로운 사회와 성숙한 문화를 실천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아베 정권 이후 일본 서점가는 혐한(嫌韓) 혐중(嫌中)을 조장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재일조선인들의 ‘특별 영주 자격’을 박탈하고 다른 외국인처럼 취급하자는 ‘재특회(재일의 특권을 허용하지 말자는 시민의 모임)’회장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상황이다. 즉 일본의 국수적 민족주의에 기대어야 책이 잘 팔린다는 뜻이다. 이에 이들은‘무릇 출판은 표현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되어야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표방하여 차별을 조장하거나 그릇된 역사를 옮기는 등의 행위는 일본 헌법에 보장된 공공의 복지에 반한다’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경종을 울렸다. 즉 출판계의 자정 행위를 통해, 더 이성적인 시민사회 그리고 자유 민주가 성숙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 이 출판인들의 모임은 일본 지성계의 큰 격려 속에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앞서 말한 ‘재특회’의 코리아타운이나 민족학교의 위협적 시위에도 나를 포함한 외국인들이 맞서기는 쉽지 않다. 항상 비자 걱정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재특회의 이런 망동에 적극 대항하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일본인들이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일본 시민사회에 대한 부러움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시민운동 세력도 아니고 정치적 이념을 지향하는 단체도 아닌 출판 관계자 모임은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말할 수도 없는 불황에 허덕이면서도, 잘 팔리는 책인, 타민족, 소수자에 대한 증오와 편견을 조장하는 책을 스스로 자정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번 도쿄대행진에서 나는 ‘난민 환영,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라는 표어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서 이민족 차별이 심각한 일본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를 생각한다. 전 세계에서 화교(華僑)가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 박정희 정권 때 얼마나 많이 그들의 삶을 유린했던가. 그래서 우리 사회에 큰 힘이 되었을 그들은 모두 떠나고 이제는 몇 명 남지도 않았다. 지금도 모든 열악한 법적 위치에 놓여있다 한다. 또 외국인 이주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근대의 한반도 역사는 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국에서 벌어지는 한민족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도 같은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단일민족의 신화에서 벗어나고 함께 사는 지구촌 인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영화 베테랑의 대사처럼 ‘돈은 없어도 가오(顔)는 있는’ 자긍심 넘치는 사회로 재탄생할 수 있다.
고영란 일본 니혼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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