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문예지들 문학에 치중할 때
분단 극복ㆍ서민 고통 대변 선언
사회과학ㆍ경제학 게재 담론 이끌며
폐간ㆍ판금ㆍ구속 등 수난의 세월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으로 혼란
베스트셀러 내 경제적 입지는 다져
신경숙 사태로 세대교체 요구 직면
1966년 1월 첫 호가 나온 창작과비평은 문학에 치중하는 기존 문예지들과 달리 사회과학, 인문과학, 경제학, 민중운동사에 관한 글을 두루 게재하며 사회변혁 담론의 구심 역할을 했다. 현실의 고민을 담으라는 문학의 소명을 명시했고, 1985년 57호에서 시작된 ‘한국자본주의 논쟁’(일명 ‘사회구성체 논쟁’)처럼 사회운동의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1974년 출판사 창비가 설립된 후에는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황석영 소설집 ‘객지’, 리영희 평론선 ‘전환시대의 논리’, 신경림 시집 ‘농무’ 등을 펴내며 정치적으로는 민족통일, 문학적으로는 리얼리즘의 노선을 걸었다.
창비의 50년은 폐간과 판금 조치, 해직, 구속으로 점철된 수난의 세월이었다. 1970~80년대는 극심한 탄압의 암흑기이자 민중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황금기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조태일 시집 ‘국토’와 신동엽전집이 판매 금지를 당하고, 김지하 시인의 ‘빈산’이 실린 잡지가 회수됐다. 1977년에는 리영희 한양대 교수가 편역한 ‘8억인과의 대화’ 때문에 리 교수와 백씨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기도 했다. 1980년 봄호에 기획된 특집 좌담 ‘80년대를 위한 점검’은 검열에 의해 전문 삭제돼 발행됐고 양성우 시집 ‘북치는 앉은뱅이’도 판매금지 됐다. 그 해 7월 창작과비평은 국가보위입법위원회 결정으로 강제 폐간됐다. 78년 봄호부터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참여한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당시 “최소한의 민주주의마저 박살 날 형편”이었으나 오히려 저항의 기운이 등등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
1985년 출판사 창비는 비정기간행물의 형태로 창작과비평을 펴내지만 불법 간행물이라는 이유로 서울시로부터 출판사 등록을 취소 당한다. 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 전신),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 진보단체뿐 아니라 창비와 라이벌 격이었던 문학과지성사 등 11개 출판사 대표가 나서서 항의성명을 발표했고 이는 범지식인 서명운동으로 확대됐다. 1988년 창작과비평은 8년 만에 정식 복간됐다.
1990년대 들어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하면서 창비는 기존의 확고했던 정치ㆍ문학적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며 만년 적자를 벗어나 경제적 입지를 다지는 시기였다. 이은성 ‘소설 동의보감’,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최영미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창비는 처음으로 상업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6년 파주로 사옥을 이전한 후 아동ㆍ청소년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고 문학과 인문 분야에서 다양한 책을 펴냈지만, 매체 환경 변화로 불황에 시달리는 출판시장에서 정체성을 다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백씨는 분단체제론, 중도주의 변혁론, 2013년 체제론 등 시대적 실천담론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이와 별개로 창비는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와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공유하며 색이 흐려지는 모습을 보였다.
2015년 6월 터진 신경숙씨 논란에서 끝까지 표절 판단을 유보한 창비의 대응은 세대교체 요구에 불을 붙였다. 한때 민중을 이끌던 음성이 대중을 가르치는 목소리가 되고, 탄압 받는 문인들의 피난처가 도리어 작가들을 통제하는 권력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당시 오길영 충남대 교수는 ‘창비와 백낙청 체제 50년’이란 글에서 “한때는 효율적이었던 체제도 시간이 경과하면 굳어진다. 굳어지면 생명력을 잃는다. 지금의 신경숙 사태는 창비의 백낙청 체제 50년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라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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