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말’들의 생고생이 심상치 않다. 태생이 선한 말들이 악한 기운을 풍기는 일에 동원돼 총알받이가 되고 있다. 진실하지 못한 일엔 진실이란 말이, 올바르지 않은 일엔 올바르다는 말이, 또 온통 비정상인 일엔 정상이란 말이 차출돼 갖은 부조리와 부패, 불의를 가려주고 있다.
존재가 탐욕적이고 생활이 위선적인 세력이 말의 ‘착한 힘’을 그악스럽게 악용한 결과이다. 본래 말은 사람과 말해진 바를 직결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맹자가 한 말이 담긴 책 이름이 ‘맹자’였고, 장자의 말이 담긴 책 이름은 ‘장자’였다. “글의 품격은 그 사람의 품격에서 비롯된다(詩品出於人品)”는 믿음이 오랜 세월 동안 의심되지 않았으니, 말은 곧 말한 이의 인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여 좋은 말을 하는 이는 왠지 선하게 보이고, 나쁜 말을 하는 이는 왠지 악하게 보이곤 한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본 성선설이 저 옛날부터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 가운데 주류였을 듯싶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고대 중국에선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성악설이 주류였다. 특히 제자백가가 활약했던 시기 성선설은 비유컨대 ‘고립된 섬’이었다. 맹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만 그리 믿었지, 절대 다수의 지식인은 성악설 또는 “사람 본성 자체에는 선함도 없고 악함도 없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지지했다.
그 이후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성선설의 본산인 ‘맹자’는 유교의 고전은커녕 금서에 가까운 푸대접을 받았다. 착한 말임에도 백안시되고 억압받은 꼴이다. 그러다 12세기에 들어 주희 등 성리학자에 의해 비로소 ‘논어’에 비견되는 유교의 경전으로 격상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몽골의 원 제국 시절 성리학이 제국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정립되자, 성선설은 비로소 정통으로 거듭났다. 섬에서 주류가 되는 데까지 줄잡아 1,500여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하면 그리 말하는 사람도 선하게 보이고 듣는 사람도 기분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왜 그리 됐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성선설은 피치자나 치자 모두에게 별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저 옛날이든 오늘날이든 “당신들은 선하게 태어난 존재이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강자의 말은 사회적 약자에겐 주로 “내 말 잘 들어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성선설이 말하는 선함, 곧 하늘의 선함을 강자들이 자기에게 착하게 구는 것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늘에 순종함이 선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잘함이 선한 것이 된다. 물론 강자들은 자기의 선함이 곧 하늘의 선함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선할수록 약자들의 삶은 오히려 팍팍해짐이 하늘의 뜻일 리는 만무하다.
반면에 사회적 강자에겐 선함이 강조될수록 이익이 커질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도 그렇고 역사에서도 그러했다. 문제는 맹자 같은 인물의 상존 가능성이었다. 그는 무척 ‘센’ 자였다. 제후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군주가 이익을 밝히면 똑같이 이익을 탐하는 신하에 의해 제거된다고 아뢨다. 거침이 없었다. 간언을 듣지 않으면 혈연이 먼 중신은 미련 없이 다른 나라로 가고 가까운 중신은 당신을 죽일 것이라며 서슴없이 제후를 겁박하였다. 언뜻 익히 할 수 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같이 결기가 서린 말이었다.
한술 더 떠 폭군을 권좌에서 내쫓음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널리 알려진 역성혁명론이다. 그는 폭군의 축출은 못난 필부를 내쫓는 것이지 군주를 내쫓는 게 아니라고 단언했다. 혹 제후 아니라 그보다 높은 천자라 할지라도 강직하게 간언함은 신하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일 힘을 지닌 군주 앞에서 정치를 못하면 쫓겨나든지 아니면 죽든지 둘 중 하나라고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성선설은 맹자가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없이 행할 수 있었던 근거였다. 그가 보기에 군주가 타고난 선함을 지키지 못했다면 군주의 명을 따를 이유가 없게 된다. 군주의 권위는 하늘로부터 온다. 그런 군주가 하늘이 그에게 부여한 선함을 오염시켰다면 그를 따름은 오히려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하늘의 뜻을 따르자면 선하지 못한 군주를 따라서는 안 된다. 이렇게 성선설은 역성혁명을 정당화 해주는 윤리적 근거였다. 그러니 함량이 부족한 사회적 강자가 성선설을 달가워했을 리 만무했다.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착한 말이 자기 명줄을 끊는 비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힘만 있지 정의롭지 못한 강자들이 착한 말을 학대하는 지금 그 덕에 ‘진실한’, ‘올바른’, ‘정상적’ 같은 착한 말들이 부쩍 부각되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덕분에 성선설과 같은 착한 말의 힘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갖춰졌다. 물론 강자들은 원치 않겠지만, 착한 말은 모가지가 아무리 비틀려도 그 힘이 반드시 실현되기 마련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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