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 ‘배신자’로 강력 성토
‘기업 애국주의’는 정치적 착각일수도
국내 기업정책도 현실 변화 직시해야
‘문화지체(Cultural Lag)’ 는 물질문화의 급격한 변화 속도를 가치관이나 신념 같은 비물질문화의 변화가 미처 따라잡지 못해 빚어지는 부적응 현상을 말한다. 자동차의 급속한 보급에도 불구하고 교통질서 의식은 좀처럼 성숙되지 못하는 상황이 사례로 흔히 제시된다. 오늘날 그런 지체가 가장 완강하게 벌어지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기업에 대한 정치인들의 인식인지 모른다.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전개된 세계화 물결 속에서 기업은 이미 글로벌시스템으로 진입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쓴 토마스 프리드먼에 따르면, 세계화 이전의 세계엔 이념과 보호무역, 자본통제 같은 장벽으로 나뉘어 저마다 양상이 다른 수많은 국가경제가 산재했다. 그런 국가경제에서는 정부가 영토 내의 모든 경제시스템을 규율하는 최종 관리자였고, 기업도 법인(法人)으로서 국민처럼 인식됐다.
하지만 격렬한 세계화로 독자적 국가경제를 지탱했던 장벽이 대부분 무너지면서 기업은 이제 영토를 넘어 세계 어디서든 생산과 투자활동을 벌일 수 있는 진정한 ‘세계시민’으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여전히 기업은 조국의 공익에 복무하는 게 당연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세계 변화에 둔감한 후진국 얘기가 아니다. 세계화의 본산인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조차 그렇게 보일 정도다.
최근 미국 제약사인 화이자가 본사를 미국에서 아일랜드로 옮기자 미국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아일랜드에 있는 보톡스 제조업체 엘러간과 합병해 세계 1위 제약사로 거듭난 화이자가 본사를 옮긴 목적은 뻔하다. 실효법인세율이 25% 이상인 미국 대신 5% 남짓에 불과한 아일랜드에 본사를 둠으로써 세부담을 회피하려는 ‘세금바꿔치기(택스인버전ㆍtax inversion)’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탈영병’, ‘배신자’ 같은 용어를 동원해 화이자를 강력 비난했고, 민주ㆍ공화 양당 대선 주자들도 앞다퉈 화이자 때리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애국적 기대를 배반하고 택스인버전을 결행한 건 화이자 뿐만 아니다. 지난해 8월엔 버거킹이 본사를 캐나다로 옮겼고, 올 들어서도 이미 의료기 업체인 메드트로닉, 제약사인 샐릭스, 코카콜라엔터 등이 절세를 위해 각각 아일랜드와 캐나다, 영국 등으로 둥지를 옮겼다. 나아가 구글이나 애플 같은 정보기술(IT) 업체들처럼 국제 조세제도의 허점이나 국가별 세법 차이를 이용한 기업들의 조세회피가 심각해지자 최근 G20 정상회담에서는 ‘벱스(BEPS)’, 즉 국가 간 소득이전을 통한 세원 잠식(조세 회피)에 대응하기 위한 ‘구글세’ 도입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구글세 도입 합의는 어떤 국가에도 복속되지 않고 수익을 추구하겠다는 기업들의 탈국가적 행보에 뒤늦게 눈 뜬 각국이 어떻게든 국가의 근간인 조세권만은 지키겠다는 안간힘인 셈이다. 그러나 숱한 난관을 넘어 구글세가 시행돼 연간 1,000억~2,000억 달러로 추정되는 글로벌 법인세 누수를 줄이는데 성공한다 해도, 더 이상 모국 정치권의 ‘배신자’라는 비난에 몸을 사릴 기업은 없어진 게 분명하다.
기업에 대한 애국적 기대감의 정도는 우리나라가 더 강할 것이다. 수많은 네티즌과 시민단체, 노조 등이 일만 터졌다 하면 벌떼처럼 일어나 삼성과 현대를 앞다퉈 욕하는 것도 그만큼 더 많은 애국적 기여를 기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ㆍ야ㆍ정 모두가 고용과 투자, 조세 등 대부분 경제정책에서 기업의 적극적 역할을 요구하는 걸 당연시 하는 것도 그런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우리 대기업 중엔 본사까지 타국으로 옮긴 사례는 아직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중과 정치권의 애국적 기대에 맹목적으로 부응할 기업은 더 이상 국내에도 없다는 현실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어떠한 정의를 내세우는 경제정책을 추구하더라도, 국가와 사회는 기업들의 국내 생산활동을 장려할 만한 여건을 제공하면서 합당한 기여를 요구하는 새로운 ‘사회적 거래’의 모델을 찾아내야 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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