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유대인 난민신청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안네 프랑크는 15세에 난민캠프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고 지금쯤 보스턴에 사는 77세 할머니가 됐을지도 모른다.”
워싱턴포스트는 24일 미국 아메리칸대학교 역사 교수 리처드 브레트만이 2007년 했던 말을 언급하며 현재 미국에 정착하길 희망하는 시리아 난민을 세계 2차 대전 이후 독일 점령지를 피해 떠돌던 유대인에 비교했다.
당시 미국으로 입국을 시도했던 많은 유대인은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프랑크 가족(아버지인 오토 프랑크, 어머니 에디트 프랑크, 언니 마고트 프랑크와 안네 프랑크)처럼 입국을 거부당하고 은신 생활을 하다 발각돼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됐다.
브레이튼 교수는 유대인 연구소(YIVO)가 발표한 자료 중 프랑크 가족이 미국 입국비자를 받으려 고군분투했던 흔적이 담긴 서류를 인용하며 “이 80장 분량의 서류는 안네의 가족뿐 아니라 당시 정처 없이 숨어 지낸 수많은 유대인의 삶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안네의 가족들은 나치의 계속되는 유대인 학살을 피해 절박한 심정으로 미국 비자를 마련하려 시도했지만, 막대한 자금과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유대인 연구소가 공개한 서류 중에는 오토 프랑크가 자신의 대학 동기이자 메이시 백화점 창립자 아들인 슈트라우스 주니어에게 “미국 비자 보조금으로 5천달러가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며 “부디 내 두 딸의 운명을 생각해 달라”고 청원하는 편지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독일의 세력이 점점 화장되자 나치 내통자가 이민자 무리가 유입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입국 절차를 까다롭게 바꿨다. 1939년 미국 영사관은 이민에 필요한 교통수단을 예약해 둔 것이 아니라면 비자를 발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1941년 6월엔 아예 문을 닫기 시작했다. 7월에는 미국 이민정책을 새롭게 바꾸면서 새로운 진술서를 요구했고 독일에 가까운 친척이 머문다면 비자발급을 하지 않겠다는 기준을 만들었다. 브레이튼 교수는 “나치 세력이 독일에 남은 유대인 친척에게 압박을 가해 미국 이민자를 감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한 명이라도 미국 비자가 없으면 가족 전체의 이민 허가를 무효화한다는 기준까지 나오자, 오토 프랑크는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립국인 포르투갈이나 쿠바로 도망치려는 시도도 했지만 그 역시 무산됐다.
결국, 비자를 얻지 못한 안네 가족은 1942년 6월부터 1944년 8월까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건물 창고에서 은신 생활을 하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발각돼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안네와 마고트는 각각 15세, 18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했고 어머니도 수용소 안에서 숨졌다. 뉴욕타임스는 자료가 공개된 당시 “어떻게 본인이 이민 후에 미국에 이득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한 글들은 처참했다”며 “안네의 일기는 당시 일기를 쓰지 못할 정도로 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실향민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보도했었다.
전영현 인턴기자(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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